2、
그 후 한국과 관련이 없는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한국과 관련이 없는 사람과 선을 보고 결혼했다.
1993년부터 97년까지는 한국과 완전히 떨어져 살았다.
공백기간을 거쳐서 1998년부터 다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정주부로 살고 있었지만
남편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나 혼자 심심했기 때문이다.
먼저 학생시절에는 없었던 한글능력검정시험(준2급)을 보기로 했다.
무사히 합격을 했고 같은 해에 한국어능력시험 5급을 땄다.
그 다음해(1999년)에는 한국어능력시험 6급에 합격했다.
자신감도 어느정도 생겨서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마음 먹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국제교류센터를 비롯해
여러 공적시설들이 있어서 회의실을 저렴하게 빌릴 수 있었다.
먼저 시험적으로 “한글 일일강좌”를 기획해 보았다.
그런데 홍보를 제대로 못 해서 그런지
10명정도 들어가는 방에 60대 남자 분 한 분이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해주셔서 좋았다.
그때는 한류 전이라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2000년부터 정기강좌를 시작했다.
수강생 모집은 가와사키시 홍보지의 시민 공지판을 이용했다.
시 홍보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모집할 때마다 10명 정도 모였다.
낮에 하는 거라 주부가 90%였다.
2000년은 영화 쉬리가 일본에서 개봉되어 흥행을 이룬 해다.
한국영화, 요리, 여행, 음악을 통해서
한국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한류 전야의 분위기랄까.
또한 영어를 공부하러 해외로 유학 갔다가
한국남자와 사귀게 됐다는 여자도 몇명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 의외로 많았던 것 같다.
가와사키에서 한국어강좌를 운영하면서
요코하마 생협과 도쿄 Y문화센터에서도 가르치게 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마음이 설레는 좋은 시기였다.
그렇지만 2004년, 남편 일 때문에 오사카로 돌아가게 돼서
그동안 쌓아왔던 인연이 끝났다.
つづ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