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책정과 일본어 策定에도 쓰임새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제가 번역한 <은하 영웅 전설>이라는 애니에서도 그런 사례가 나왔습니다. 바로 아래의 대사입니다.

 

帝国軍の指揮官はおそらく、あのローエングラム伯です。彼の軍事的才能を考慮すれば、作戦計画の策定には慎重すぎるということはないと思いますが。

 

작전 계획의 '책정'???

저만 의외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우린 계획이나 전략의 경우 '수립'한다고 하는 게 일반적이고 '책정'한다고는 안 하지 않나요? 그래서 이번에 책에 쓰기 위해서 더 자세히 검색을 해 봤는데, 마침 저와 비슷한 의문을 지닌 한국인이 질문을 올린 게 있더군요. 아래 캡처를 보시죠.

 

 

​우리는 '책정'이라는 한자어를 예산, 요금, 비용 등 주로 가격 같은 것을 결정한다는 뉘앙스로 쓰는 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저 사람 역시 '책정'이라는 한자어의 양국의 쓰임새가 다르다는 걸 간파하고 일본인들에게 질문을 한 것이겠죠? 블로그 이웃님들 중에서도 동감하는 분 많으시죠?

그럼 사전의 뜻풀이를 찾아봅시다.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계획이나 방책을 세워 결정하다.

차기 예산을 금년도 수준으로 책정하다.

정부는 매상 가격을 생산비 이하로 책정하였다.

예산 책정이 늦어지다.

사원들의 휴가비는 미리 책정을 해 두었다.

 

예문도 역시나 예산, 가격, 휴가비 등이 나오네요. 그럼 일본의 국어사전을 찾아봅시다. 코지엔은 너무 두리뭉실하게 나와 있어서 다아지린 사전의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政策や計画などを考えてきめること。「予算案を―する」

 

흠... 뜻풀이 자체는 한국과 어금버금이네요. 한국의 경우 '계획이나 방책'을 결정한다는 뜻이니 한국 역시 '계획'에 '책정'이라는 한자어를 써도 틀린 건 아니란 말이네요. 하지만 실제 쓰임새는 조금 다르죠? '계획을 책정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한국인도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일반적인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가격, 비용, 요금 같은 걸 'OO원으로 책정하다'는 식으로 많이 쓰죠? 그렇다면 일본은 어떨까 싶어서 "円に策定"로 해서 검색해 봤더니...

 

 

검색 조건을 압축하지 않고 검색했는데도 달랑 4개가 나옵니다. 그마저도 2개는 좀 다른 케이스고, 한국과 비슷한 쓰임새로 쓰인 건 두 번째와 세 번째 2개인데 세 번째는 한국 사이트고 두 번째도 일본 사이트가 아닌 모양입니다. 보시면 아시겠듯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예문들을 제시하는 사이트입니다. 그래서인지 검색 조건을 일본과 일본어로 좁혀서 검색하면 저 2개는 뿅 사라집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예컨대 예산으로 'OO원을 책정하다'는 식으로도 쓰죠. 그래서 ”円を策定”로 해서 검색해 봤더니 놀랍게도 검색 건수가 70만이 훌쩍 넘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도 검색을 많이 해 봐서 이젠 잘 알죠. 검색 건수로 표시되는 게 허수인 경우도 많다는 것을요. 그래서 아래로 스크롤을 해 봤더니 보시듯 2까지밖에 없고, 또 2를 클릭하면 건수가 0이라고 뜹니다.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시면 円이랑 を策定가 바로 연결이 되는 게 아니라 計画랑 연결되는 것이죠? 円 부분은 괄호로 묶어 놨죠. 물론 円이랑 を策定랑 바로 연결되는 예도 없진 않았지만 극소수였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위와 같은 쓰임새가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흔하게 쓰는 표현은 아니란 사실이겠죠? 다시 말하지만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말입니다.

그럼 일본의 경우는 주로 어떤 쓰임새로 쓰이는지 예문을 찾아봤습니다.

 

 

사업계획서, 규정, 폴리시를 '책정'...

한국인들도 이런 식으로 쓰나요? 개인적으로는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다른 사이트의 예문도 한번 봅시다.

 

 

법안, 슬로건을 '책정'?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죠.

 

 

​여기선 비전, 미션, 스케줄도 '책정'을 쓴다고 돼 있군요. 그런데 다른 사이트에서는 심지어 매뉴얼도 '책정'한다고 하는 예문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사전의 뜻풀이로만 본다면 이와 같이 써도 틀린 거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쓰임새가 아닌 건 분명하지 않나요? 아무튼 이 부분의 판단은 각 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만 저라면 다른 표현을 택하겠습니다. 특히나 매뉴얼, 슬로건, 폴리시, 미션, 사업계획서 등의 경우는 '책정'이라고 번역하진 않을 거 같습니다.

日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경우는 예산, 비용, 가격 등을 정하는 걸 '책정한다'라고 쓰는 게 일반적인데 일본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아래의 예문을 들어서 일본인에게 부자연스러운 게 어떤 것들인지 알려 달라고 했더니 일본인이 답변을 단 내용입니다. '요금', '가격', '비용'의 경우는 뒤에 '안(案)'을 붙여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도 '개인적 감각이니 틀렸을 가능성도 크다'는 단서를 달았내요. 아무튼 이걸로 유추 가능한 사실은 일본의 경우 (예산은 제외하고)요금, 가격, 비용을 '책정'한다고 하는 건 일반적인 건 아니라는 것이겠죠.

 

그런 이유로 저라면

작전, 계획, 전략, 정책, OO안(案) 등은 '수립'이라고 번역하고

방침의 경우는 '세우다, 정하다, 결정하다' 등

규정의 경우는 '정하다, 결정하다' 등

사업계획서는 '만들다, 작성하다' 등

슬로건은 '만들다, 정하다, 결정하다' 등

비전은 '세우다, 정하다' 등

스케줄은 '짜다, 정하다, 결정하다' 등

이런 식으로 다른 단어나 표현을 선택할 거 같습니다.

이웃님들 중에 더 적절한 다른 단어나 표현이 생각난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분들한테도 참고가 될 수 있게끔 말이죠.

 

<코패니즈 한자어> 책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