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 The Statue of M 건립자: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 서울신문사 관리자:서울특별시 중부공원녹지사업소 관리번호:10-1-9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주소: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에서 태어나 1919년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때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곧 귀향하여 인근 교회와 학교의 지도자들과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아침 일찍부터 천안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등에서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으며, 이때 유관순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시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는 유관순을 이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하였으나,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으로 결국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柳寛 The Statue of M 建設者:愛国先烈 先祖建立委員会、ソウル新聞社 管理者:ソウル特別市 中部公園緑地事業所 管理番号:10-1-9 柳寛順は1902年12月16日忠清南道木川郡 二東面芝嶺里 (現住所:忠清南道 天安市 東南区並川面柳寛順生家キル 18-2)で生まれ、1919年4月1日に並川面アウネ市場の独立万歳運動を主導した。 梨花学堂高等科1年生の時、巨族的な3.1独立万歳運動が起きると、すぐに帰郷して近隣の教会と学校の指導者たちと万歳運動を協議し、4月1日のアウネ市の日を利用して独立万歳運動を展開することを決議した。 4月1日、アウネ市場には朝早くから天安一帯だけでなく清州、鎮川などで3千人余りのデモ群衆が集まり、この時ユ·グァンスンはあらかじめ準備した太極旗をデモ群衆に配りデモ隊列の先頭に立って独立万歳を叫びデモ行進を主導した。 これに対し、日本憲兵は銃剣を振り回して無差別射撃を敢行し、ユ·グァンスンの父親のユ·ジュングォンと母親のイ·ソジェなど19人が現場で殉国し、30人余りが負傷した。 日帝はユ·グァンスンをこの独立万歳運動の主導者として逮捕し、西大門刑務所に監禁したが、ユ·グァンスンは獄中でも引き続き独立万歳を叫び、厳しい拷問で結局1920年9月28日、18才の花のような年齢で獄中で殉国した。 政府では故人の功勲を称えて1962年に建国勲章独立章を追叙し、2019年3月1日に建国勲章大韓民国章を追加で叙勲した。
유관순 일사는 1902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7일) 충남 목찬군 아동면 지령리 (한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 보통과를 거치 1919년에 고등과 1학년에 입학한 유관순 열자는 서명학·김복순 · 김희자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 를 결성하여,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뿌)을한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교령이 내려져 고향으로 내려온 유 열사는 학교, 교화와 유림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너누어주며 사워를 이끌었다. 이날의 시위에서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고, 자신은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유 알사는 공주에서 5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경상복심법원에서는 당시 소요죄의 최고형인 3년항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도 끊임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지하 김방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였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체포 당시 당한 부상과 계속되는 고문으로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연 락 ·관리 · 관리 아야! 대한의 딸 유관순은 이곳에 영원히 살아있다. 겨레의 누나로 가듭나 영원히 민족의 가상을 세우고 조국을 수호하리라.
柳寛順一士は1902年12月16日(旧暦11月17日)、忠清南道木賛郡児童面智嶺里(チュンチョンナムド·チョンアンシ·トンナムク·ビョンチョンミョン·柳寛順生家キル18-2)で、父親のユ·ジュングォンと母親の李ソジェとの間の3男2女のうち、次女として生まれた。 梨花学堂普通科を経て1919年に高等科1学年に入学した柳寛順列者はソ·ミョンハク、キム·ボクスン、キム·ヒジャ、グク·ヒョンスクなどと共に「5人の決死隊」を結成し、大漢門の前で望谷(望プ)をした後、3·1万歳運動に参加した。 儒教令が下されて故郷に降りてきたユ烈士は学校、教化と儒林などを訪問して万歳運動を協議し、4月1日アウネ市場で3000人余りの群衆に直接製作した太極旗を配りながらサワーを率いた。 この日のデモで両親をはじめ19人が日本憲兵に殺害され、自身はデモの主導者として逮捕された。 ユアル社は公州で5年懲役刑を受けたが、慶尚復審裁判所では当時の騒擾罪の最高刑である3年項を宣告された。 西大門刑務所でも絶えず大韓独立万歳を叫ぶと、地下のキムバンに閉じ込めて厳しい拷問をしたが、最後まで志を曲げなかった。 ところが逮捕当時に受けた負傷と相次ぐ拷問でついに祖国の独立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まま、1920年9月28日午前8時20分西大門刑務所のイ·ドゥウン監房で殉国した。 連絡·管理·管理アヤ! 大韓の娘、柳寛順(ユ·グァンスン)はここに永遠に住んでいる。 同胞の姉として生まれ変わり、永遠に民族の家相を立て、祖国を守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