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알자】제주 4·3 사건 済州島4・3虐殺事件;韓国版ウィキペディアより | しま爺の平成夜話+野草生活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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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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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날짜 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일
장소 제주도 전역
결과 공산 유격대 토벌, 극심한 민간인 피해 발생.
참여 군대
미군
국방경비대
제주경찰
서북청년단
남조선로동당 ­
지휘관
송요찬
유재흥
김익렬
조병옥
박진경
김달삼
이덕구
­
병력
3000여명 500여명 ­
피해 규모
군인 180여명
경찰 140여명
(민간인)
14,000여명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 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 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있다.[1]

배경[편집 ]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의 진상조사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 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 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 )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 계열의 좌익 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 을 비롯한 우익 반공 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부터 좌익계열 활동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 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 청과 협조적이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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済州4.3事件の真相究明と犠牲者の名誉回復委員会の真相調査結果によると、済州4.3事件当時の済州島の状況は解放に膨らんだ期待感が徐々に崩れて、米軍政の無能に対する不満が徐々に広がっている雰囲気だった。約6万人にのぼる帰還人口の失業私、生活必需品の不足、伝染病(コレラ)の蔓延、大飢饉と米穀政策の失敗など、さまざまな悪材料が重なった。特に過去の日本植民地時代、当時の警察出身者が米軍政警察への変身、密輸取り締まりを口実にした米軍管理の森行為などが民心を刺激していた。事件の背景には、韓国単独政府樹立に反対する南朝鮮労働党系の左翼勢力の活動と軍政警察、西北青年団をはじめとする右翼反共団体のチョギョルの済州道民の反感などが複合されて、双方の間の敵意に起こった。

済州島は日本植民地時代から左翼系の活動の伝統が強い地域で光復後、道民の積極的な支持の中建国準備委員会と人民委員会が活発に活動した。特に済州島人民委員会は、他の地域とは異なり、米軍政庁協調だった。[2]


그러나,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래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 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 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 17일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또 다시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4월 10일 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 [3]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주민 70%가 좌익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 의 비서 박갑동 은 어느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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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1947年に3.1節記念式で騎馬警官の馬の蹄に子供が轢かれることがボルオジョトゴ、これを見たデモ群衆は騎馬警官に石を投げ揶揄を送って警察署まで追いかけていった。ところが、警察がこれを警察署襲撃と誤認してデモ隊に発砲し、6人が死亡し、6人が重傷を負った。発泡事件の全貌を知らなかった米軍政当局は、この発泡事件を誤ってを認めながらも、正当防衛であると主張して事件を「デモ隊による警察署襲撃事件」でギュレイベント幹部と学生を連行し始めた。一方経貿部は3万デモ群衆が警察署を包囲襲撃しようとしたので、必然的に発砲したと釈明しながら民心が沸き立った。これ南労党は、このような民心の流れを逃さず、組織的な半径活動を展開した。最初はチラシを貼る仕事死傷者救援金募金運動を繰り広げた。

3月10日から済州道庁をはじめと官民ゼネストが発生して、済州島の警察や司法機関を除いた行政機関大半23機関、105個の学校、郵便局、電力会社など済州会社員95%に達する4万人余りが参加し、さらに済州警察の20%にもストライキに参加した。警察は3月15日からストライキ関係者検挙に乗り出し、この過程で、3月17日、受刑者の釈放を要求する群衆の中に再び発砲する事件が起こる。警察は、4月10日までに500人ほどを検挙したが検挙者のうち66人の警察が波面され、その桁は西北青年団所属で補充されることにより、[3]済州道民と軍政警察と西北青年団の間では、対立と葛藤がさらに大きくなっていった。

1947年3月19日、米軍政情報レポートでは、米軍政は、済州島の住民の70%が左翼またはそのシンパとして認識した。朴憲永の秘書バクガプドンはある程度支持したのは事実だと述べた。




사건의 시작[편집 ]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 에 반대하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5]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유언비어와 반감, 공포가 합해져 유혈사태는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 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인적피해를 보면,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6] [7]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6월 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 은 그해 6월9월 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에 참석차 제주도 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 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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済州4・3事件の発端は、8・15光復以降、韓国での単独政府樹立のための5・10総選挙に反対するために、1948年4月3日午前2時、南労党済州島あたり骨髄党員ギムダルサムなど350人余りが武装をして、[5]済州島内24個の警察支署のうち12個支署を一斉に家宅捜索しながら始まった。ここで右翼団体のチョギョルの済州道民のデマと半減、恐怖が合わさ流血事態は急速に済州島全域に広まった。

これによって、済州全域に行政機能が麻痺するなどの深刻な治安の不安状態が続いた。この済州4・3事件は韓国戦争が終わるまで続けており、人的被害を見ると、<済州4.3特別法>による調査の結果、死亡者のみ14.032人(鎮圧軍による犠牲者10,955人、武装隊による犠牲1,764人ほか)に達している。[6] [7]事件を起こした主役のイ・ドックは、6月に警察官発砲で射殺され、ギムダルサムはその年の6月末、9月のて全朝鮮政党社会団体連席会議のに出席するため、済州島を抜け万虐殺は1953年韓国戦争が終わるまで続いた。







경과[편집]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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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過[編集]

李承晩政府は10月11日、済州島に警備司令部を設置して、本土の兵力を済州に増派させた​​。 1948年10月17日、第9連隊長ソングヨチァン(宋堯讚)少佐は海岸線から5㎞以上入った山間地帯を通行する者は暴徒倍みなさ銃殺するという布告を発表しました。布告はソゲリョンにつながり、中山間村の住民たちは、海辺の町に強制移住された。そして大々的な強硬討伐作戦が済州全域を襲ったことになる。

11月17日済州島に戒厳令が宣布された後に、中山間地帯は文字通り焦土化の惨状を経験した。 11月中旬ごろから翌年2月までの約4ヶ月間鎮圧軍は山間の村に火をつけ、住民を集団的に殺傷した。中山間地帯だけでなく、海岸沿いの町に紹介した住民も武将隊に協力したという理由で殺された。その結果、命を購入するために入山する避難者がさらに増え、寒い冬を漢の中で隠れて通ってキャッチ射殺されたり刑務所などに送られた。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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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ヶ月の間に行われた討伐隊の焦土作戦で中山間町95%以上が放火され、町自体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いわゆる「失われた町」が数十個に達することになる。この強硬鎮圧作戦は、最終的に生活の基盤を失った中山間の村の住民2万人を山に追いやる結果をもたらした。

1949年3月、済州島の地球の戦い司令部が設置され、鎮圧と宣撫を併用する作戦が展開された。新任ユジェフン(劉載興)司令官は、漢拏山に避難していた人々が帰順するすべて許しという斜面ポリシーを発表する。この時、多くの住民がハッサンし、1949年5月10日再選が成功裏に行われた。 1949年6月、武装隊の総責イ・ドック(李德九)が射殺されることにより武将隊は事実上壊滅された。

しかし、韓国戦争が勃発し、悲劇は再び起こる。韓国戦争中の報道連盟加入者、要視察者、入山者の家族などが予備検束という名前でつかまっ集団に虐殺された。また、全国各地の刑務所に収監された4・3事件関係者も即決処分された。






★筆者注


島民の5人に1人が虐殺されたとも言われ、多くの島民が日本に密航してきた。

かなりの数の密航者に対して、日本政府は特別処置で在留許可を与えた。

現在の在日韓国人の多くは、この済州島から逃げてきた方々の子孫であり、戦中無理に日本に連れてこられてそのまま仕方なく日本にいると言う方はほとんどいないはず(戦後に、希望者250名程度を本国に帰還させている)。

このとき日本政府が善意で行った出入国管理法の例外的特例が今も生きており、半島人は一般外国人より犯罪などに関して緩やかな決まりになっている。

これが一部団体が言う、在日特権と言うものであり、この部分は確かに一般の外国人を差別している。


また、生活保護などに関しても、憲法を無視し、日本国民ではないものへの支給が行われていると言う話も出ている。


さらに詳しくは、日本版ウィキペデアを参照ください。


この時の密航者には、現在著名になっている半島系経営者をかなり含んで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