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大地震>日本大地震に募金した慰安婦被害者キル・ウォンオクおばあさん・上 | トンポ・トンネ 日々イモジョ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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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ウル発「ウイークリー京郷」(4・5)
日本大地震に募金した慰安婦被害者キル・ウォンオクおばあさん・上
 
 
 
 
[특집]“눈 감기 전에 진실한 말 들어보고 싶을 뿐”
2011 04/05주간경향 919호
ㆍ일본대지진 성금 모금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지난 3월 1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기 수요집회는 조용했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리 높여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집회 참여자들은 이날 침묵했다. 일본 도호쿠 지진 피해자들을 향한 묵념이었다. 길원옥 할머니(84)는 다른 이들과 함께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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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원으로만 9000여명 이상 사망한 일본인들에 대한 예의라고 할머니는 생각한다. 실종자만 1만6000여명이 넘는다. 1995년 한신 대지진 피해를 뛰어넘는 참사다.

3월 23일 수요집회에선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미리 준비한 봉투를 모금함에 넣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할머니가 ‘다른 데서 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한다는데 우리는 안 하냐’고 말씀하셨다. 활동가들도 모금까지 하자는 말에 잠시 당황했었다”고 밝혔다.

할머니의 모금 제안에 활동가들 놀라
길원옥 할머니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이 일본인 지진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독한 말이 안 나온다.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건 70년 전 이야기예요. 지금 당장은 일본 사람들이 입은 피해가 너무 참혹하지 않아요?”

70년 전 이야기라고 했다. 두 세대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다시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처럼 긴 시간의 강물을 지나면 웬만한 고통은 다 흐려지고 뭉개져 마침내 지워질 수도 있는 걸까. 그런데, ‘웬만한 고통’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평양에 살던 열세살 소녀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 하얼빈으로 갔다. 거기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나게 추웠다는 생각만 난다.

고물을 주워 내다팔던 아버지가 감옥에 갇혔다. 남이 훔친 물건을 팔았다는 이유였다. 감옥에서 나오려면 “그때 돈으로 20원인지 얼마인지”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평소에 알던 사람을 따라나섰다. “공장에 가서 일하면 월급 주고 좋은 기술 가르쳐준다”고 그가 말했다. 도착한 곳에서 조선인은 볼 수 없었다. 일본인만 보였다. 일본인들은 죄다 군인들이었다. 열세살 소녀 길원옥은 그 뒤 1945년까지 ‘위안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1940년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군인들은 초경을 갓 지난 조선인 소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다. 반항한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지 않으면 다행인 날들이었다. 너무 울어 별명이 ‘울보’가 됐다. “쳐다만 봐도 무서운 군인들이 옷을 벗기려고 하면 안 울겠어요.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울면 울지 말라고 때리고, 맞으면 아프니 또 울고….”

군인들을 상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래톳에 걸렸다. 가래톳에 걸리면 넓적다리의 임파선이 붓는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는 ‘요꼬네’라는 일본어로 박혀 있는, 성병과 동시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일본 사람들이 수술을 시켰는데 자궁을 잘못 건드렸어요. 나중에 배 양쪽에 이만한 혹이 생겼어. 애를 못 낳게 됐어요.” 그래서 용케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어느 날 어떤 남자가 ‘하나코’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위안소에서 쓰던 이름이다. 이번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부로 갔다. 1942년이었다. 왜 두 번이나 가게 된 것일까. “열서너 살에 무엇을 알았겠는가”라고 생각할 뿐이다.

군인들은 이번에도 봐주지 않았다. 생리 중이라는 것도 이유가 안 됐다. “생리가 뭔지도 모르고 몸이 속에서부터 찢어져서 피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생리가 나올 때는 그래도 좀 봐주겠지 했어요. 피가 나오니까 봐주겠지… 뭐라 할 말이 없어.” 겪지 않은 사람들이 그 치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반세기 만에 세상으로 나오다
길원옥 할머니는 그 치욕을 반세기 넘도록 숨기고 살았다. 일흔을 넘긴 1998년에야 한국 정부에 위안부 신고를 했다. 신고를 한 후에도 2002년까지는 지난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2003년 정대협 정기 수요집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2007년 11월에는 벨기에 브뤼셀까지 날아가 유럽의회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증언했다. 지난 8년 동안 위안부 문제를 백안시하고 독도가 제 땅이라 주장하며 교과서를 왜곡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섣불리 일본과의 화해를 말하는 한국 정부도 비판했다. 할머니들이 고령으로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어느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의 대열에서 앞자리에 서게 됐다. 심하게 아팠거나 외국에 나갔을 때만 빼면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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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기 위해 유럽의회를 찾은 길원옥 할머니. 가운데는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인 메넨 카스티요, 오른쪽은 네덜란드 위안부 피해자인 엘렌 판더 플뢰그. AP연합뉴스

위안부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다 드러낸 후 할머니는 여러 차례 바다를 건넜다. 핀란드와 벨기에에 갔다. 독일과 영국에 갔고, 호주에도 갔다.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물론 일본도 빠뜨리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할머니들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다 미안하다고 그래요. 수요집회에도 일본 사람들이 안 오는 때가 없어요. 여기서 듣는 데서 끝내지 말고 합심해서 문제가 빨리 해결되도록,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 기쁘게 만날 수 있게 힘써달라고 부탁해요.”

일본에서는 조선인학교 재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 시정도 요구했다. “한 번은 가서 그랬어요. ‘우리 조선학교 학생들이 여기(조선학교)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나. 조선인 1세대가 와서 무한고생하면서 인간의 본능으로 생겨난 아이들이다. 특별대우는 못할망정 차별을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할머니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많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평생의 한이 마음 속에 단단하게 응어리진 까닭이다. 할머니에게는 제 몸으로 낳은 아이가 곧 세상 전부다.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세상이라서다. “사람이 자식이 없으면 일생이 끝나는 거예요. 사람이 세상에 나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정을 이뤄서, 자식 낳아 잘 키워야 해요. 위안부들은 그걸 모르고 살잖아요. 열세살에 거길 가서 해방되고도 부모 소식을 모르고 언니 오빠 소식도 몰라. 그저 아침 먹고 하루 시작하고 저녁 먹고 잠자고, 이걸로만 세상을 살자니….” 할머니는 위안부 시절 얻은 병이 악화되면서 스물여덟에 자궁을 완전히 들어냈다.

続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