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文化財団発行の「プラットホーム」に載った「在日同胞の北韓訪問記」-下 | トンポ・トンネ 日々イモジョ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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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하는 <플랫폼>에 실린 글
 
재일동포의 북한방문기-하
북한으로 흐르는 한류
 
김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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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시아주버니와 시누이가 나와 있었다. 세관을 지나서 짐을 버스에 싣고 숙소인 평양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마당에는 방문단 가족들이 몰려와 있었다. 지쳐서 말이 없었던 방문단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들일까. 호텔에서 준비한 저녁식사를 빨리 끝내고 시어머니와 우리 부부는 친척들이 기다리는 일층 식당으로 갔다. 시아주버니의 큰딸이 낳은 손자는 벌써 소학교 1학년생이었다. 만삭의 몸을 한 둘째딸은 남편과 함께 와 있었다. 8년 만의 상봉이었다. 새로 반기면서도 시아버지와 언제나 활달한 웃음을 짓고 있던 시누이의 남편이 없는 것이 서운했다.
 
그간 방문단 형식도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견학이 우선이고 빈 시간에 친척을 만나는 식이었다면, 지금은 가족상봉이 최우선이다. 가족들이 사는 지방에 갔다가 떠나기 전날 평양에 있는 방문단에 합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호텔 앞에서 방문단을 위한 버스가 매일 코스를 바꿔 운행하는데, 희망자는 물론 북한에 사는 가족들도 같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튿날, 만경대로 가는 버스차창을 통해 평양 거리를 구경했다. 전에는 한산했던 거리가 사람들로 붐볐다. 자동차와 자전거가 많아졌다. 거리가 활기차고 밝아진 것에 놀랐다. 여성도 남성도 옷차림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팬츠룩에 놀랐다. 얼마 전까지 평양에서 여성의 바지 차림은 금지사항이었다. 작년에 평양을 방문한 내 친구는 거리를 걷다가 "거기 바지 여성"이란 소리에 안내원과 함께 도망쳤다고 한다. 시장에서 단속에 걸렸다는 선배도 있었다.
 
그런데 "식민지시기 항일유격대 여대원들은 바지를 입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이 있은 후, 2009 8 <노동신문>에 여성들의 팬츠룩을 허락하는 글이 실렸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여성도 바지를 입고 당당하게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을 걸어가는 여성들의 팬츠룩이 생각보다 세련되었다. 특히 젊은 여성들 중에는 도쿄의 거리를 걸어 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단속이 풀리기 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여성들의 팬츠룩 허용과 비슷한 경위를 거쳐서 단속이 풀린 것이 더 하나 있다. 계몽기가요일제시대 유행가의 북한식 표현으로 <두만강>, <찔레꽃>, <홍도야 우지마라> 등이 있음이다. 계몽기가요는 북한에서 1990년대부터 불렸지만, 2000년 이후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TV에서는 방북 중인 남측 가수 김연자의 공연모습은 물론 전문가들이 모여 가창력과 서비스 정신을 칭찬하는 프로그램까지 방영되고 있었다.
 
그 후로도 많은 가수들이 방북하고 2005년엔 조용필도 왔었다. 북한의 어디를 가도 계몽기가요가 들릴 정도로 유행하자 그것이 단속대상이 되었다. 음반이 회수되고 부르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유행은 말릴 수 없는 법이다. 얼마 지나 김정일 위원장이 발언이 있은 후, 계몽기가요가 모란봉 등 공원이나 노래방에서 다시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29년 전 처음 방북했을 때 "과음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수령님께서 그런 말씀 안하셨다"고 대답한 안내원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고, 그 흐름이 커져 말릴 수 없을 때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이 떨어지나 보다. 
 
방문 3일째 생전에 시아버지가 구해놓은 재일조선인 묘를 찾아갔다. 8년 전에 왔을 때보다 정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 입구엔 "해외동포애국자묘지"란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문이 서있었다. 시아버지를 납골하고 재일조선인운동 초창기부터 고생을 같이한 시아버지 선후배들의 묘를 돌아보았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묘를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기신 분도 많다고 들었다.
 
납골식을 끝내고 묘지 옆에 있는 숲에서 점심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쌀봉투를 자전거에 실은 젊은 여성들이 지나갔다. 남한에서 온 구원물자 봉투도 아껴 쓰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이라 불렸던, 제일 어려운 시기 때, 제일 먼저 막대한 양을 지원한 것이 남한이었다. 지원의 규모도 컸지만 그 규모만큼 북한 사람들의 대남의식을 크게 바꾼 것 같다. 이번 방북기간에 남한에 대한 부정적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남북관계는 잘 될 것이지요"란 말을 거듭 들었다.
 
북한 사람들의 그런 말을 "그저 지원이 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재일동포들은 제일 어려운 시기에 북한에서 지원받아 학교를 운영했다. 그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일정한 토대를 닦았지만 재일동포들은 북한의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북한 축구대표로 활약하는 안영학이나 정대세는 조선학교를 졸업한 재일조선인이지만 그들이 북한에 집착하는 것은 결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북한의 배려 때문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마음의 교류가 중요하다.
 
이번 방문기간 동안 공연 <아리랑>을 보고 남포갑문과 그곳의 배수리소를 견학했다. 또 시장도 가고 시아주버니와 시누이의 집도 가보았다. 아침에는 대동강 주변에서 바둑을 두거나, 조깅 혹은 낚시를 하는 사람들, 공사하는 사람들,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평양은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전에 규율이 강하고 조용하고 한산했던 곳이 활기 있고 약동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요인의 하나가 "한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일본에도 한류는 강하게 불었지만 기껏해야 한국문화라는 작은 물줄기를 만든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에 불었던 "한류"는 사람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놓은 것 같다.
(<PLATFORM> 2009 19)
 
 
<플랫폼> 20(MAR/APR 2010)에 실린 <독자의 글>
김숙자 씨가 쓴 <북한에 흐르는 한류>도 시의적절한 글이다. (생략) 북한 소식을 접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김숙자 씨의 글은 무척 소중하다.
(김동명/대학원생/서울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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