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文化財団発行の「プラットホーム」に載った「在日同胞の北韓訪問記」-上 | トンポ・トンネ 日々イモジョ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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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ピョンヤン訪問記」の改訂版に掲載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하는 <플랫폼>에 실린 글
 
재일동포의 북한방문기-상
북한으로 흐르는 한류
 
김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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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26일부터 9 3일까지 시아버지의 유골을 평양에 있는 재일조선인 묘에 납골하기 위해 시어머니, 남편과 함께 북한에 다녀왔다. 2008 4월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다. 현재 평양에는 시아주버니와 시누이 가족들이 살고 있다.
 
재일조선인 2세인 남편의 일가는 본래 1965년에 북한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재산 처리에 문제가 있어, 시아주버니만 신학기에 맞춰 혼자 귀국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직장을 떠날 수 없어 일본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1972년엔 시누이가 귀국했다. 일본의 조선대학교를 다니던 시누이는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했다.
 
당시 대기업 히타치(日立)에 취업을 거절당한 재일조선인과 그 지원단체가 일으킨히타치 취업재판이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엔 일류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도 재일조선인이 대기업에 취업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취업만이 아니라 조선이나 한국 국적을 가진 학생들의 입학을 인정하지 않는 사립대학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그 당시 사방이 막힌 일본보다 귀국해서 고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돌아간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 후 일본사람인 시어머니가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0 4월로, 아들과 15년만에 만난 것이다. 시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평양을 찾아 가족을 만났다. 세워보니 이번이 15번째 방북이 된다.
 
나의 이번 방북은 4번째이다. 첫번째는 1980 8~9월에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외적으로 데뷔한 제6차 노동당대회를 눈앞에 두고 나는 조선대학교졸업반 제1차 조국방문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다. 그 시기는 일부 간부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북한 방문이 일반 재일조선인에게 개방된 시기이기도 해 재일조선인의 단기방문도 있었다. 당시 외부사람을 받아드리는 데 익숙하지 않는 북한은 긴장하고 있었다.
 
만경봉호(萬景峰號)일본의 니이가타(新潟)시와 북한의 원산을 오가는 여객선로 원산에 도착하니 원산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해주고, 가는 곳마다선생님이라 부르며 국빈과 같은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평양 시내를 관광하고 묘향산과 금강산도 갔다. 백두산에 갈 때는 우리를 위해서 비행기가 준비되고 과일과 과자, 소고기 통조림 등의 선물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길을 가는 사람들 모습, 호텔 시설, 안내원이나 처음으로 만나는 친척들(일본에서 북한에 귀국한 사람들)의 언행에서 생활이 어려운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분한 대접이 고마운 한편 서운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손님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우리는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에서도 외부사람이었다.
 
그 후로 1988년과 2001년에 방북했다. 1988, 조선중학교 교원이었던 나는 북한에서 하는 구사회주의권 국제야영에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 대표를 인솔하여 참가했다.
 
2001년에 북한을 방문한 것은 시아버지의 팔순잔치를 평양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시부모, 우리 부부 그리고 북한을 처음 방문하는 친정어머니와 외사촌 언니도 함께 갔다.
 
세 번째 방문 때는 북한 안주에 사는 외사촌 오빠와 친정어머니, 외사촌 언니를 만나게 했다. 내가 오빠를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방북했을 때이다. 차별이 없는 곳에서 맘껏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오빠는 외할머니에게 귀국선을 타겠다는 편지 한 통 남긴 후 행방불명되었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대대로 천주교 가정이라 반공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한 둘은 나오나 보다. 그는 안주에서 기계공장의 노동자로 부부내외가 살고 있었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편지와 얼마의 현금을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편지에는 "우리는 잘 사니까 돈은 보내지 마라"고 써 있었다. 부족한 것을 보내달라고 하는 가족도 많다고 하는데 오빠는 그런 편지 한 통 주지 않았다. 오빠를 만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사촌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풍족한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사는 것보다 부족한 것이 있어도 자기 나라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성실하게 사는 것이 오빠에게는 좋았을 것이다"라고.
 
이번 방북은 8년만이었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언론매체가 북한 때리기를 계속했고, 북한과 관련한 모든 것이악한 것이 되었다. 2006년부터는 만경봉호도 입항을 못하게 되었고 2009 6월부터는 북한 가족들에게 보내는 소포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만경봉호의 왕래가 재개되기만을 기다리던 시아버지는 2008년에 돌아가셨다. 또 반년 후에는 시누이 남편의 부고소식이 평양에서 날아왔다. 그러나 시간만 흐를 뿐, 만경봉호가 재개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도쿄에 있는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북한방문단이 이루어졌다.
 
방문단 멤버 27명 중 최고령은 87세이고, 평균연령은 75세 정도였다. 걷는 것도 불편한 노인들은 북한에 사는 가족들을 위하여 큰 짐을 몇 개나 가지고 왔다. 하네다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건너와 1박하고 평양을 향하는 일정이었는데, 베이징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노인들에게 평양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정도로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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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ピョンヤン訪問記・2009年夏

快適な共和国旅行の仕方」

B6版・334頁・日文・頒価1.680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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