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川文化財団の隔月刊誌に「記録する会」の活動・下 | トンポ・トンネ 日々イモジョ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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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도쿄대공습과 조선인의 억울한 죽음・下
 
 
일본인에 비하여 조선인 이재율이 높은 몇 가지 이유
일본특별고등과가 1945 9 25일에 작성한 「내지주재조선인전재자(內地駐在朝鮮人戰災者)」에는 당시 도쿄에 9 7 632명의 한반도 출신자가 있었고 4 1 300명이 전재자(災者=전쟁피해자)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쿄의 인구가 349만 명, 한반도 출신자는 9 7천 명을 헤아린다. 공습으로 인한 일본인 전재자가 100만을 넘는다고 하나 조선인 전재자 4 1천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전재자의 비율로 다진다면 조선인 경우가 훨씬 높다.
 
기록집에 수록된 증언을 통하여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하여 전재자 비율이 높은 이유를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조선인은 미군의 폭격이 집중된 군수 시설에서 고역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이다. 삶의 길을 찾아서 혹은 배움을 위하여 도일(渡日)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늘날의 이민이나 유학하고는 다르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에 온 후에도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갖지 못한 그들은 살아가기 위하여 군수공장이나 관련 시설에서 일터를 찾아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이재 기록, 각종 전재사 등 갖가지 자료가 반증하고 있다.
 
둘째, 미군의 폭격이 집중된 시타마치라 불리는 곳에 조선사람들이 부락을 형성하여 집단적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조선은행경성총재조사과(朝鮮銀行京城總裁調査課) 1942년에 발행한 「반도인(半島人)의 활동 상황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1941년 말 한반도 출신자는 혼죠(本所)후카가와(深川) 2만 명, 아라카와, 죠또(城東) 3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310일의 도쿄대공습에서 사상자의 80%가 시타마치라 불리던 이 3개의 구()에서 나왔다. 이를 반증하는 증언은 기록집에도 다수 반영되어 있다.
 
다음으로 공습이 심해지면서 소학생들에게는 학동소개(學童疎開)소개란 공습 등을 피하기위해 일본당국이 정책적으로 실시한 지방으로 피신하는 것을 의미’, 시민들에게는 연고소개(緣故疎開)’가 장려되었는데 지방에 친척이 없는 조선인의 경우 그 소개조차 어려워 공습이 거듭되는 도쿄에서 머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지방에 피신간 조선인 중에는 생계를 이을 수단이 없고 또한 차별이 너무 심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정도 있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쳐 공습에서 조선인의 이재율과 사망율이 일본인에 비해 훨씬 높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청산은 공습피해를 포함하여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있는 독자들도 아래에 소개하는 증언을 직시하여 도쿄대공습 때의 조선인 이재 증언수집에 힘을 주었으면 한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스사키(洲崎)에 이시카와지마(石川島) 징용공(徴用工)의 료()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이 수용된 숙소가 있었다. 거기에는 300여 명의 동포들이 있었다. 도주하지 못하도록 입구는 밖에서 자물쇠를 잠근 채 항상 감시 당하고 있었다. 대공습 당시 도망치려 해도 피신할 수가 없어 결국 떼죽음을 당했다. 장례식은커녕 고향의 일가친척에게 생사여부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일만 (이재 당시 25)
 
사루에죠(猿江町)에 있었던 조선인 부락도 전멸했다. 살아남은 교포는 없었을 것이다.” 김금수(이재 당시 20)
 
어디에 가나 민족적 차별은 뒤따랐다. 피난처에서 한또징(半島人), 한또징이라고 멸시당했다.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은 일본의 성을 강요당한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은 피난처에서조차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사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멸시는 없었다.” 김남순 (이재 당시 26)
 
아버지는 형부와 같이 어머니와 아들딸을 필사적으로 찾으셨다고 한다. 죽었다면 그 유골이라도 찾아내자고. 일대에 흩어진 검게 탄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금니를 했다고 하여 시체의 입을 열었고 형부는 언니가 출산할 때의 상처 흔적을 찾아 시체의 배를 하나하나 살폈다고 한다. 고향을 등지고 남들의 전쟁에 휘말려 죽어도 유골조차 찾지 못했으니 분했을 것이다. 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를 잃어서는 안 된다.” 박부자 (이재 당시 15)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대공습이 있던 3 1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 못하고 유골도 없이……리건중 (이재 당시 10) 仁川文化財団が発行する隔月刊誌「PLATFORM」 MAY/JUN2010より転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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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籍:『東京大空襲・朝鮮人罹災の記録』
●PART I「語り継ぐことのない」悔しさ、PART II なぜ、そこに朝鮮人がいたのか/I & II合本 B6判・二五三頁・頒価一四八〇円

●PART III「葬り去られる犠牲者」に光を B6判・二三一頁・頒価一六八〇円(二巻セット二八〇〇円)
 
▼連絡先:東京大空襲・朝鮮人罹災を記録する会 代表 金日宇
 
*「東京大空襲・朝鮮人罹災の記録」目次など詳細は
http://www4.ocn.ne.jp/~uil/p.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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