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을 넘어서는 데 걸린 시간은 분명 한 걸음뿐이었는데, 발뒤꿈치가 바닥을 뗀 그 찰나가 이상하게 길었다. 

복막 내의 내장들이 물속으로 가라앉듯 무겁게 끌려 내려가고, 귀 안쪽에서 혈관이 얇게 울렸다. 

 

그리고 “딸깍” 드라이브인의 레일이 터널로 접히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갈아 끼워졌다. 기름과 시럽의 달큰함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린 종이와 낮은 전압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둠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오래된 필름을 역광에 세운 듯, 거무죽죽한 알갱이들이 떠다녔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복도였다. 복도는 단선으로 곧게 뻗다가도 미세한 진동에 따라 비스듬히 흔들렸고, 벽은 마치 책등처럼 촘촘한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칸에는 책 대신 작은 모듈이 끼워져 있었는데, 누군가의 상태 메시지 같은 문장들이 가늘게 점멸했다.

— 이제 입장합니다
— 경험은 안전합니다
— 감정은 카운터에 맡겨 주세요


문장이 켜졌다 꺼질 때마다, 복도 전체가 숨을 쉬듯 미세하게 수축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눌러 맥을 재었다. 둑, 둑, 둑. 박자는 여전히 일정했으나, 조금 전보다 반 박자 빠르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발이 가벼웠다. 마치 바닥이 내 체중을 알고, 가야 할 방향으로 밀어 주는 것처럼.

손에 쥔 카드를 확인했다. 입장 허가, 네 글자가 옅은 분홍빛으로 반짝였고, 중앙의 구멍은 — 확실히 — 조금 더 커져 있었다. 

구멍가에는 아주 작은 톱니가 시계 톱니처럼 물려 있었고, 혀끝으로 만져 보면 금속 같은 맛이 났다. 

 

나는 구멍에 눈을 바짝 갖다 댔다. 그 안쪽에서 빛이 솟구쳤다가 잦아들었다. 빛이 가라앉자, 장면이 또렷해졌다.

하린이었다. 형광등이 덜덜 떠는 좁은 방,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설탕 고리, 벽에 붙은 A4 용지. 

 

입장 

23:31

세트

 

 

그녀는 의자에 기대 반쯤 누운 자세로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었고, 입술은 일정한 속도로 “다 숨었니?” 를 반복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구형 자막처럼 입 모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피곤한 눈빛인데도, 그 웃음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입장자 안내 1』

 

머리 위 어딘가에서 낭독이 시작됐다. 

 

스피커는 보이지 않았다. 

 

벽의 칸칸마다 문장 하나씩이 깜박이며 소리를 뱉어내는 것 같았다. 

 

『입장 시, 자기소개·진술·회고의 순으로 진입을 인증하십시오. 진술의 단위는 박자이며, 박자는 당사자의 심박에 연동됩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진술. 박자. 심박. 

여기는 개인용 거짓말탐지기이자 고해성사소였다. 내 심장이 비밀을 인정해야 문이 열린다,

 

그런 식의 규칙. 우스웠다. 

동시에 설득력 있었다. 

 

이 세계는 수치와 리듬을 신처럼 믿는다. 

드라이브인의 종업원이 말했던 “음악이 너를 먼저 알아볼 거야”— 그 말이 이제는 정식 표어처럼 들렸다.

복도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좌측에는 연한 청색의 조명이 깔렸고, 중간은 백색광으로, 우측은 아주 옅은 홍조가 섞여 있었다. 

바닥에 얇은 활자가 새겨져 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읽었다.

— 좌: 회상(過去)
— 중: 현존(現在)
— 우: 기대(未来)


선택지. 게임의 메뉴처럼 쉬웠다. 하지만 쉬운 선택일수록 치명적이다. 

나는 먼저 중간을 택했다. 현존. 지금 이 몸, 지금 이 심장, 지금 이 박자. 

 

왼발을 올리자, 바닥의 활자가 내 발자국을 따라 백악으로 덧칠되었다. 

둑, 둑, 둑. 박자에 맞춰 조명이 강약을 달리했다. 벽의 칸들이 하나씩 열렸다 닫히며, 누군가의 최근 말들이 흘러나왔다.

— 괜찮아, 나는 그냥 피곤한 거야
— 다음 주엔 좀 나아질 거야
— 곧 비가 그칠 거야


나는 무심코 웃음 섞인 콧소리를 냈다. 거짓. 단정할 수 있었다. 내 입에서도 똑같은 문장들이 수없이 지나갔으니까. 그 문장들은 삶을 무사 통과하기 위한 스펙트럼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적절했고, 그러므로 언제나 거짓에 가까웠다.

『입장자 안내 2』

 

『진술은 간결할수록 안전합니다. 단, 침묵은 입장 취소로 간주됩니다.』

침묵을 두려워하는 세계. 나는 카드의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하린의 방에서 A4 용지가 바뀌어 있었다. 

 

퇴장

00:07

반복 금지

 

그녀는 펜을 입술에 문 채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말해, 구멍이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너는 없어진다.

“내 이름은—” 

목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지금, 네가 간 자리를 뒤쫓고 있어.”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부드러워 복도에 잘 흡수됐다. 

말하는 동안 박자는 조금 느려졌고, 조명도 따라 느슨해졌다. 둔—둔— 고막이 얇게 떨렸다.

복도의 끝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끝에는 문이 있었다. 

문에는 바코드처럼 생긴 세로선이 다섯 갈래로 인쇄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조그맣게 문구가 붙어 있었다. 

 

입장=퇴장. 두 번의 같은 동작, 상반된 관성. 나는 그 문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같은 동작. 상반된 관성. 들어가면서 나갈 것을 애초에 계약하는, 이 세계의 깨끗한 폭력.

문고리를 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바퀴 소리가 날아왔다. 레일 위 트레이가 없는데도, ‘덜컥—’ 하고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 

본능적으로 돌아보니, 복도 저쪽 끝에서 붉은 꽃잎이 회오리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꽃잎은 액체처럼 뭉쳐졌다 찢어지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사람 모양을 만들었다.

얼굴이 생기고, 손이 생기고, 고개를 갸웃하는 시선이 생겼다.

“늦었네.” 

 

그녀가 말했다. 붉은색이 잔향처럼 도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드라이브인의 종업원과도, 우비의 남자와도 닮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오래된 어떤 광고 속 모델의 표정, 전혀 지치지 않는 사람의 눈빛.

 

“다 숨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녀가 웃었다.

“그래, 아직이라 말할 수 있으면 반쯤은 준비된 거야.” 

 

그녀는 내 손의 카드를 가볍게 툭 쳤다. 구멍이, 또 한 뼘만큼 커졌다. 이젠 동전이 아니라 찻잔만 했다.

구멍 안에서 바람이 나왔다. 바람엔 설탕이 탄 냄새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멀리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드라이브인의 공기가 실은, 여기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를 잃고 가.”

그녀가 복도의 벽을 툭툭 치며 말했다.

 

“과거를 잃거나, 지금을 잃거나, 미래를 잃거나. 셋 다 지키려는 사람은 거의 없지. 그건 욕심이니까.”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다섯 갈래의 세로선을 가리켰다. “너는 어떤 욕심이야?”

“나는—”

말하려던 순간, 천장에서 고주파가 날섰다. 마치 라디오가 주파수를 잡을 때의 그 가는 비명. 바닥의 활자들이 흐릿해지고, 

벽의 칸들이 한꺼번에 열렸다. 수많은 문장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 출구는 없습니다
— 기억은 보관되지 않습니다
— 반복은 금지되지 않습니다
— ‘지금 입장하세요’
— ‘지금 퇴장하세요’


어지러웠다. 세계가 문자로 변하고, 문자가 다시 세계로 응고했다.

붉은 그녀가 내 어깨를 눌러 자세를 낮춰 주었다.

 

“첫 파도야. 그냥 둬. 곧 지나가.”

그녀의 손길에서 이상하게 익숙한 감촉이 났다. 

정확히는, 하린과 밤길을 걸을 때, 그녀가 신호를 건너며 내 소매를 잡던 그 힘의 방향 — 제동도 가속도 아닌, 균형을 위한 손의 각도.

“하린을 아나?”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기선 모든 이름이 금방 낡아. 대신 흔적은 신선하지. 그 아이는 흔적을 잘 남기는 편이었어.”

 

그녀는 웃으며 내 카드의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보지 말고, 써. 들여다보면 틈이 커지고, 쓰면 문이 열려.”

“쓰…라니?”

“네 박자에 맞춰.”

그녀가 내 가슴 위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둑, 둑, 둑.

“짧고, 정확하게. 입장·진술·회고. 그 순서로.”

나는 숨을 고르고, 문 앞에서 벽의 빈 칸 하나를 골랐다.

칸은 문제지처럼 말끔했고, 위쪽에 아주 작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입장자 기록

개인용

 

손에 펜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때였다.

하지만 이곳에선 손가락으로 눌러 쓰는 것만으로도 글자가 떠올랐다. 발열된 유리처럼, 내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흰 선이 남았다.

— 나는 방금 들어왔다.
— 나는 네가 남긴 고리를 보았고, 그 안쪽에서 웃는 너를 보았다.
— 나는 나갈 것이다. 너와 함께.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바닥이 짧게 진동했다. 문고리 안쪽에서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틈이 열리며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복도의 소음이 반 박자 줄고, 멀리서 잔잔한 베이스가 밑바닥을 깔았다. 

 

23시 31분, 세트. 음악이 시작되는 시간. 그 베이스는 내 심장과 완벽히 포개졌다.

붉은 그녀가 미소 지었다.

“좋아. 회고.”

나는 두 번째 칸에 손가락을 올렸다. 

회고. 무엇을, 얼마나. 과거는 언제나 범람한다. 그러나 간결할수록 안전하다고 했지. 나는 가능한 최소한을 골랐다.

—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너무 자주 썼다.
— 그건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베이스 아래 스네어가 붙었다. 스피커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 공간 전체가 울림통처럼 연주되고 있었다. 

문은 한 뼘 더 열렸다. 안쪽에서 어두운 복도가 이어졌는데, 그 어둠은 아까의 거무죽죽한 알갱이가 아니라, 

잉크를 방금 쏟아 만든 듯 깊고 매끈했다. 그 안쪽 어딘가에서, 마이크 테스트하는 듯한 작은 피드백이 비쳤다. 치익—.

“진술.”

붉은 그녀가 속삭였다. 마지막 칸. 나는 손가락을 눌렀다. 이번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으면서 내가 무엇을 쓰려는지 알게 됐다. 마치 손가락이 나보다 먼저 합의에 도달한 느낌.

— 나는 중독되기를 원한다.
— 그러나 나가기를 더 원한다.
— 그러므로 나는 입장을 반복하되, 목적은 퇴장이다.


글자가 완성된 순간, 조명 전체가 한 번 꺼졌다 켜졌다. 베이스가 더 깊어지고, 저 멀리서 보컬의 첫 음이 틀어졌다.

아직 가사가 오지 않은, 길게 호흡을 당기는 허밍. 문이 활짝 열렸다.

문턱 너머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붉은 꽃잎 몇 장이 들썩였다가 내 발목에 붙었다.

붉은 그녀가 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여긴까지만 동행이야. 그 다음은 네 박자로.”

“네 이름은?”

나도 모르게 물었다. 물으면 안 된다는 예감이었지만,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선 모든 이름이 금방 낡아. 그래도 굳이 필요하다면—나를 ‘세 번째 바퀴’라고 불러.

레일 위에서 처음 미끄러지는 바퀴 말고, 그 다음 박자를 정렬하는 작은 바퀴.”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지 않기를 바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 왜 이토록 따뜻하게 들릴까. 

아마도 그 말 속에는 “나 역시 돌아오지 못했다” 가 겹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 사정이 묻은 말로 타인을 위로한다.

문 안으로 첫 발을 들이자, 어둠이 내 발목을 감싸며 관자놀이까지 차올랐다.

어둠은 차갑지 않았다. 아니, 따뜻하지도 않았다. 

 

온도 없는, 농도만 있는 진공. 센서처럼 민감해진 귀에 새어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다 숨었니? — 이번엔 명백하게, 바로 앞에서. 그리고 아주 작게, 얹히는 또 다른 문장. 出て行け (나가라).

나는 멈추지 않았다.

박자는 이미 시작됐고, 음악은 나를 알아봤다. 드라이브인의 종업원 말대로였다.

 

내 심장과 스네어가 같은 날을 세고, 스탠드 조명의 없는 빛이 내 동공의 크기를 조절했다.

 

나는 카드 — 이미 찻잔 크기까지 커진 그 구멍 — 를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구멍 속 세계가 심장과 맞물리며 회전했다. 그 회전에서 미세한 은빛 가루가 튀어 나와 어둠을 점으로 찍었다. 점들이 모여 길이 되었다.

나는 그 길 위를 걸었다.

 

그리고 두 걸음, 세 걸음—네 번째 박자에서, 무언가가 내 앞을 스쳤다. 

머리칼의 끝이 이마를 살짝 긁는 느낌. 익숙한 샴푸 냄새. 하린.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잡은 것은 허공이었다. 그러나 허공은 물처럼 탄력이 있었다. 

허공은 물러나며, 내 손끝을 끌었다. 손의 방향이 정해졌다. 

 

바로 거기—어둠 속에 달려 있는 작은 문, 마치 구식 사진관의 편집용 창처럼 네모난 개구. 거기에 희미한 불빛이 깜박였다.

나는 그 문에 이마를 댔다. 안쪽에서 누군가가 같은 방식으로 이마를 갖다 대는 느낌.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체온이 합해졌다. 반박자 동안, 우리 둘의 심장이 같은 박자를 쳤다.

“하린.”

나는 조용히 불렀다.

그때, 문 안쪽에서 아주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똑같은 이름을 불렀다.

“너.”

문이, 안쪽에서 먼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