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15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로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 즉 일본 통치권을 막부에서 천황에게 되돌려 주는 대정봉황(大政奉還)이나 에도 무혈 개성 등 막부 말기에 많은 인물들이 활약하였지만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이며 그로 인해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를 모면할 수 있었고 일본의 근대화에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장군에 취임했을 때는 제2차 조슈 전쟁중이었지만 사쓰마, 조슈 동맹 등이 원인이 되어 막부측이 패배.

막부를 둘러싼 정치 정세가 어려워져 대정봉황을 요시노부는 즉석에서 결정.

그렇지만 정권을 반납 받은 조정은 정치 능력이 없어 실질적으로는 도쿠가와의 정권이 계속되는 형태가 되는 바람에 도쿠가와 가문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고 싶은 타도 막부파에 해 천황 중심의 정치를 하는 왕정 복권의 대호령을 선언.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사쓰마, 조슈는 에도에서 도발 행위를 계속합니다. 드디어 구 막부군과 신 정부군은 교토에서 충돌하여 토바 후시미의 싸움이 시작되고 이것을 시작으로 보신전쟁이 시작됩니다.

 토바 후시미의 싸움 중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로 도망을 가며 신 정부군에 대해 복종하는 의미로 스스로 우에노에 있는 관에지라는 절에 들어가 근신합니다.

교토, 오사카를 제압한 신 정부군은 에도성 총공격을 결정. 이러한 궁지에서 요시노부의 모든 신임을 받은 구 막부군측의 가쓰가이슈와 신 정부군 측의 사이고타카모리의 회담에 의해 에도성 무혈 개성이라는 평화적인 해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신전쟁 종결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미토에서의 근신 생활이 풀리게 되었고

시즈오카로 옮겨져 약 20년간 여기에서 거주하였습니다.

 현재 이곳은 JR 시즈오카 역에서 걸어서 가까운 곳으로 후게쓰로(浮月楼)라는 일본 전통 요릿집(요정)이며 도카이의 훌륭한 정원으로 불려지는 아름다운 일본 정원과 도쿠가와 요시노부 저택 터로 유명합니다.

이 일본정원은 시티호텔에 묵거나 요릿집에서 식사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幕末において、最も重要な人物

 

15代将軍 徳川慶喜

理由:平和的な政権交代となった「大政奉還」と江戸城の無血開城には様々な幕末の人たちが活躍しましたが、最終決断は将軍であった徳川慶喜がしたからです。慶喜の決断により西欧列強の植民地化をまぬかれ日本の近代化に一役を買ったと思うからです。

 

徳川慶喜が将軍に就いたとき第2次長州征伐では薩長同盟などが原因で幕府が敗北。

幕府をめぐる政治情勢の厳しさから政権を幕府から朝廷へ返上する大政奉還を即座に決めました。しかし、政権を返上された朝廷には政治能力がなく実質的には徳川の政権が続く形になったため、徳川家をまったく無力にしたい討幕派による天皇中心の政治を行う「王政復古の大号令」を宣言。

なんとしても開戦の方向に持っていきたい薩長は江戸で挑発行為を続けます。ついに旧幕府軍と新政府軍は衝突し鳥羽伏見の戦いが始まり、これを皮切りに「戊辰戦争」が始まる。

鳥羽伏見の戦いの最中に徳川慶喜は江戸に逃げ新政府軍に対して恭順の姿勢を取り自ら上野の寛永寺に入り謹慎の身になります。

京都、大阪を制圧した新政府軍は江戸城総攻撃を決定します。この窮地に当たり慶喜が最後の望みを託した勝海舟と新政府軍側の西郷隆盛の会談により江戸城無血開城という平和的解決になりました。

戊辰戦争の終結により徳川慶喜は水戸での謹慎生活を解かれ、もとは駿府代官屋敷であった静岡に移り約20年間この地に居住しました。

 

現在ここは静岡駅から歩いてすぐのところで浮月楼(うげつろう)とうい料亭になっていて

東海の名園と言われる美しい日本庭園、そして徳川慶喜公屋敷跡として有名です。

ホテルに泊まるか、料亭で食事をする人だけがこの日本庭園に入れます。(ランチは4000円か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