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ハンギョレ新聞コラム】現在を問うということ―パク・ユハ著『帝国慰安婦』批判として | ANTIFA★黒い彗星검은혜성  だにえる단열の一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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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動。社会運動には必ずついてくる「当事者」と「支援者」の二分法や「当事者」搾取・利用・消費という問題。さらに過度な干渉と理想をぶつけてくる「支援者」への批判としての「当事者」至上主義といった過度な防衛態度と、「当事者」至上主義を掲げる「支援者」がさらに「当事者」を搾取・利用するという帰結、運動理念の喪失、その繰り返しによる理念対立と対立構造から生まれる外部からの搾取と運動の衰退など、運動のなかで何度も経験しそうな中で、重要なことに気づかされるエッセイとして、下記の記事を翻訳します。 
 私もパク・ユハ氏の『帝国の慰安婦』に関して批判的に見ています。まず帝国日本の戦争犯罪で、人道上の犯罪である戦時性奴隷制である「慰安婦」問題に対して、日韓という両国間の政治的な関係に矮小化し論じているところなどですが、それはまた別なところで、詳しく論じます。 
 被害の「当事者」を固定化し易い、運動の論理は批判されて当然でありますが、固定的な存在、簡単な被害図式や心理によっては説明つくすことのできない流動的存在こそが私たち人間であるという前提にたちながら、問題解決の「当事者」として、「当事者」性の境界と侵犯について慎重に考えながら、「当事者」との関係をどのように紡ぐか、参加している自分はどの文脈で当事者性を帯びるのかを考え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く思います。
 そして、過去の問題は常に現在の問題として現前し、未来へ繋げるのものとして、私たちの現在であるし、現在を生きる私たちの責任であ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ことから、社会をみつめ、さまざまな問題の原因である悪しき構造を批判し、具体的な解決を模索しながら、社会を変えなければいけないと思います。私たちの力で。
(もちろん、そもそも多くの問題が、とくにこの「慰安婦」被害者の方々は、今でもご存命の方が多くいらっしゃることを、そして、残された時間が少ない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


[세상 읽기] ‘현재’를 묻는다는 것 / 후지이 다케시【世界を読む】「現在」を問うということ/藤井毅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藤井毅 歴史問題研究所 研究室長

さいきん、話題になっている『帝国の慰安婦』を今となって読んでみた。さまざまな感想を抱いたが、一番問題と感じたのは「運動」を見つめるパク・ユハ(著者)の観点であった。「日本の支援運動」が「政治化」され「帝国日本」だけでなく、「現在の日本」まで批判す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指摘をしながら、著者は次のように話す。「慰安婦問題の解決が困難だったのは、ずばりそのような方法で、運動が『現在』を問う運動になったせいである」と壁にぶつかったような感じであった。

 私が1990年代日本で「慰安婦問題」解決のための運動に参加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のも、まさにそのように現在を問う運動だと考えからだった。もちろん、「日本軍慰安婦」という存在自体は過去に属した問題であるが、「慰安婦問題」は現在の問題である。そして、現在という時間の中で私もこの問題を知ることができた。すなわち、私は現在という時間を媒介に慰安婦問題に出会えたのだ。著者は過去と現在を分離する理由を帝国日本と戦後日本の断絶を強調する立場からそうしているように見えるが、この問題を過去の問題というだけで扱うときに、これを媒介にした現在、言い換えれば「私たち」を可能にする現在は消えてしまう。残るのは、専門家による真実を究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過去の「慰安婦」だけだ。

 このように過去と現在の分離を支える論理が、「当事者」と「支援者」という二分法である。著者は「結局、支援者たちを意図するものではなかったとしても慰安婦問題支援運動は問題解決そのものよりも『日本社会の改革』という左派理念を重視する方に傾いた。そこでも「慰安婦」はこれ以上『当事者』であ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ような当事者性の問題を提起する。この評価は国民基金(アジア女性基金)が正解だったという前提の上でなされたものなので、その妥当性にも問題があるのだが、それより大きな問題は「慰安婦問題」を「慰安婦当事者」だけの問題として制限しようとするパクの視線である。「当時、支援者/団体が天皇制廃止を方向づける『日本社会の改革』の志向よりも、慰安婦問題だけに集中していれば慰安婦問題の解決は可能だったかもしれない」という評価は、このような視線の問題をよく見せてくれる。結局は純粋な支援運動ではなかったせいで失敗したという話だ。このような論法の問題性は今の韓国社会の脈略のなかで見れば、より明確になる。

4・16(セウォル号惨事)以降現在まで続く、大規模な集会を批難するときによく使われる言葉として「セウォル号を政治的に利用するな」がある。「パク・クネ大統領退陣」を掲げて、青瓦台(大統領府)に向かおうとする彼らは、「純粋な追悼ではない別の意図」を持つ存在として描き、分断しようとする試みは言論を通じて繰り返されている。それでも多くの人たちが街へ出る理由は、彼らが「当事者」であるからだ。

1990年代から慰安婦問題解決のために展開された運動の当事者はやはり「慰安婦はるもにたち」だけでない。当事者と支援者という二分法は運動のなかで形成される「私たち」を打ち破って各自の位置をまた固定させる。そうしながら当事者の運動の成果を判定基準になり、支援者はその成果のために奉仕する存在になってしまう。ここで新しい社会は生成されない。

〈帝国の慰安婦〉は重要な省察を含んでいたりもする。慰安婦問題を通じて、(米軍)基地村(における独裁政権時の管理売春被害の問題)を考え、資本の問題を提起する観点は重要である。それにも関らず、「慰安婦問題を本当に解決したければ、基地問題を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そのためには日本との和解が必要だ」と、すなわち米軍基地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日本と和解しようというとんでもない主張が提示されるのは、どんな論理だろうか?それはどのような当事者か?
     
                               藤井毅歴史問題研究所室長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를 이제야 읽어보았다. 여러 느낌이 들었지만, 가장 문제로 느껴진 것은 ‘운동’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었다. ‘일본의 지원운동’이 ‘정치화’되어 ‘제국 일본’만이 아니라 ‘현대 일본’까지 비판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운동이 ‘현재’를 묻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내가 1990년대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 현재를 묻는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는 과거에 속하지만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는 현재의 문제다.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나도 이 문제를 알게 되었다. 즉, 나는 현재라는 시간을 매개로 위안부 문제를 만난 것이다. 저자가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까닭은 제국 일본과 전후 일본의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문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다루게 될 때, 이 매개로서의 현재, 바꿔 말해 ‘우리’를 가능케 하는 현재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전문가에 의해 진실이 규명되어야 할 과거의 ‘위안부’뿐이다.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의 분리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당사자’와 ‘지원자’라는 이분법이다. 저자는 “결국, 지원자들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 지원운동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일본 사회의 개혁’이라는 좌파 이념을 중시한 셈이 되었다. 그곳에서도 ‘위안부’는 더이상 ‘당사자’일 수 없었다”는 식으로 당사자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평가는 국민기금이 정답이었다는 전제 위에서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타당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당사자’만의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그의 시선이다. “당시 지원자/단체가 천황제 폐지를 향한 ‘일본 사회 개혁’의 지향보다 위안부 문제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는 그런 시선을 잘 보여준다. 결국 순수한 지원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논법의 문제성은 지금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더 분명해진다.
4·16(세월호 참사)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대규모 집회를 비난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은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다. ‘박근혜 퇴진’을 내걸거나 청와대로 향하려고 하는 이들을 ‘순수한 추모가 아닌 다른 의도’를 가진 존재로 그려내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언론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이유는 그들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전개된 운동의 당사자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만은 아니다. 당사자와 지원자라는 이분법은 운동 속에서 형성되는 ‘우리’를 깨고 각자의 위치를 다시 고정시킨다. 그러면서 당사자는 운동의 성과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며 지원자는 그 성과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서 새로운 사회는 생성되지 않는다.
<제국의 위안부>는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를 통해 기지촌을 사유하고 또 자본의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은 중요하다. 그런데도 결론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기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화해는 필요하다”는, 즉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해하자는 엉뚱한 주장이 제시되는 이 괴리는 무엇일까. 그는 어떤 당사자인가?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45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