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教祖の隠し子「朴サムエル氏」講演(韓国語) | ちゃぬの裏韓国日記

ちゃぬの裏韓国日記

カルト統一教会と世界支配層との関係をあばく
(統一教会=世界平和統一家庭連合)


http://howwelldoyouknowyourmoon.tumblr.com/tagged/Sam-Park



비디오 링크: https://youtu.be/xPwJYC9h93M

“읽으신 분들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Mariah Blake 라는 기자가 저에 관하여 쓴 기사들이 있습니다. ‘The New Republic’ 과 ‘Mother Jones’ 잡지에 게재되었지요. [아래 링크 참조] 그러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새로운 건 아닐 수 있지만, 그 기사들에 실리지 않은 새로운 정보들이 아직 더 존재합니다. 새로운 정보들 또한 흥미롭게 봐주신다면 좋겠네요.

이런 것이 처음인지라 – 전 정말 초보자랍니다 – 다룰 부분이 많다보니 미리 써놓은 것을 읽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구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여러분의 시간을 모두 낭비한다면 [Donna Orme-Collins 를 가리키며] 이 분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Donna: “맞아요, 그건 싫어요.”

사무엘: “아닙니다, 그렇게 되길 원치는 않아요. … [일동 웃음]

이렇게 제 이야기를 시작하길 원합니다. 한 번 시작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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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통일교의 억만장자 설립자이자, 통칭 “모든 인류의 구원자라 선포된” 文鮮明 문선명 목사의 숨겨진 아들 (또는 최근 기사들에서 묘사한 대로는 “사생아”) 입니다. 저의 어머니 催淳華 최순화씨는 Soon W. Choi 는 권력을 갖춘 억만장자 최씨 가문의 자손이었고, 최씨 가문은 한국에서 두번째로 큰 보험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금장 건물인 서울의 63층 금색 본부건물로 인해 널리 알려진 대한생명 회사의 이전 소유주였습니다.
[대한생명, 1946년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한화생명으로 알려짐]

저는 부와 광신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삶은 돈, 섹스, 권력 그리고 음모로 가득찬 한국 드라마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절대 권력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타락시키는지 직접 목격해 왔습니다. 저는 지옥으로의 길이, 비록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적인 정의감에 의해 뒤틀렸을 지언정, 얼마나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있는지 보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거절당했다는 심리와, 저의 탄생의 상황에 대해 비밀로 해야했던 점이, 내 삶의 대부분에 있어 내가 그림자 안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삶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 철학과 심리학 부전공으로 문학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동대에서 금융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지난 10년간, 저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운동과의 1999년 기밀협정계약에서 비롯된 소송에 이런저런 형태로 관여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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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머니처럼, 저도 한때는 저의 아버지, 문선명 목사가 만인류의 구원자라 믿도록 훈련되었었죠. 그렇지만 제 할머니께서 통일교로 데려갔던 경우인 저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저는 그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개종의 경험” 을 겪은 것도 아니고, 가족들과 의절하거나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는 제 삶의 방식이었지만,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름’ 은, 제가 12살 때쯤, 12세 후반 아니면 13세 초반 즈음에 저의 생부모가 사실은 문선명 목사와 Soon W. Choi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드러났습니다. 제가 부모와 형제자매라고 본래 생각했던 사람들 (朴普熙 박보희와 그의 아내 尹基淑 윤기숙,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은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키우고 제 진짜 부모의 정체를 숨기도록 문선명 목사에게 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와 통일교운동과의 소송의 중점은 바로 이 강압적인 사기와 저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약속하고는 지키지 않은 많은 약속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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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머니와 문선명 목사와의 관계는, 문선명 목사가 17살의 나이에 저의 어머니를 강제로 범하여 그녀의 처녀성을 뺏었던 195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잠시 멈춤] 저의 아버지가 말하기로는 저의 어머니가 그의 영원한 신부 또는 통일교 용어로는 “참어머니” 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와 성관계를 맺어야했던 것은 되돌리기 위해… 통일교 용어들이 많이 나올 텐데, 용서하세요. 통일교에 대해 알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 겁니다 – 이 영상을 많은 통일교 신자들이 볼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니, 제가 그런 용어들을 쓰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하길 – 사실 강간한 것이죠 – 그는 대천사 루시퍼가 어린 이브에게 한 짓을 되돌리기 위해 그녀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 했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성경의 이브가 17살이었을 때 대천사 루시퍼에게 유혹당했고, 이것이 성경에 묘사된 인류의 타락의 진짜 이유라고 가르쳤죠. 이것이 통일교 신자들이 이해하는 인류의 타락입니다.

먼저 저의 어머니의 가족 (최씨 가문) 이 문선명 목사의 초기 종교운동의 시작 때부터 맡은 중심적인 역할에 대해 알지 않고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 운동에 우리가 관여된 배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 신자들에게도 비신자들에게도, 이 최씨 가문의 “숨겨진 역사” 의 시사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참 중요합니다.

저의 아버지가 1953년 처음 저의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의 이름만으로도 그녀가 그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득삼李得三이었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 가지를 얻는다” 는 뜻인데 한국 기준으로도 꽤나 특이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통일교 신자에게는 이 이름이 정말 중요한데요, 이는 그 이름이 창세기 1장 28절에 묘사된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계를 다스리는, 이 세 가지 축복이라는 원리강론 (통일교 신앙 체계) 의 중심되는 명령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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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가문의 부를 발판으로, 저의 할머니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몇백만불을 기부하는 등 초기 통일교 운동 재정의 주된 후원자였습니다. 실제로, 초기 통일교회에서 할머니가 돕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통일교 내에서 그리도 사랑받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달러가치로 보자면, 1950년대 중반의 백만불은 오늘날의 팔백 오십만불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1950년대 초반 그녀의 백만불짜리 맨션을 팔아 통일교회에 기부한 것에 더하여, 그녀는 1973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거액을 계속 기부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崔聖模 최성모는 그의 시대에서는 상당히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26세에 자력으로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백만불이 정말 의미가 있을 시절에 말이죠) 전재산을 얻고 또 잃고를 세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할머니가 통일교에 들어간 1950년 초반에는 이미 신동아 그룹 (최씨 가문 소유의 대기업) 을 수억만달러 규모 기업으로 키워낼만한 발판을 잘 닦아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서울시의 권력의 회랑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당시 대통령 朴正熙 박정희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워싱턴 DC 에서의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주도하도록 여러번 보내졌습니다. 박정희 재임 기간 중, 그는 청와대와의 핫라인이라고 불리던 직통 전화선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자문위원회와 유사한 단체의 수장이었으며, 경제 정책에 있어 대통령에게 밀접히 조언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정예 기업 집단을 세웠고, 세금 납부액으로 보았을 때 삼성그룹의 설립자이자 그의 친한 친구인 이병철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 두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만나면, 사업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지요. 어떤 점에서는, 이런 것이 저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성공과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자녀들과 고용인들의 행복이었습니다. 그의 내심은 겸손하고 고결한 사람이었고, 당시대 가장 도덕적인 사업가로 여겨졌으며, 이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가장 그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사실입니다 – 특히 당시 한국의 부패 정도를 감안했을 때 한국인 사업가로서 말이죠, 현재도 부패한 한국이구요.

가문의 지위를 보았을 때, 저의 아버지가 최씨 가문의 지원을 받는 데에 왜 혈안이 되었을지는 자명합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지원으로, 권력의 회랑 [즉, 청와대] 과 재정 자원이 그의 초기 운동에 활짝 열린 셈이 되겠죠. 좋은 지원을 바탕으로라면 그가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 예측이 불가한 수준이었겠구요. 저의 아버지에겐, 최씨 가문이란 그의 구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왕관의 보석과도 같았습니다. 통일교 비신자들에게는 제가 다음 할 말들이 얼토당토않겠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의 아버지는 저의 어머니에게 여러번이나, 하나님은 최씨 가문을 통해 인류 역사의 전체를 완성시키길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저의 할아버지가 역사상 대천사의 위치에 해당하고, 저의 두 삼촌들 (저의 어머니의 남동생들) 이 역사상 가인과 아벨의 위치에 해당하며, 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언니 (두 사람 모두 저의 할머니가 1953년 통일교에 들어간 직후 통일교에 들어감) 가 역사상 레아와 라헬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믿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두 친자매들과 결혼하고, 그 자매들과 몸종들과 열두명의 아들을 낳음으로써 성경의 야곱의 삶을 본떠야한다 믿었습니다. 야곱처럼, 저의 아버지는 먼저 언니 (저의 이모) 와 1960년에 결혼하기로 계획했고, 7년이 지난 후 그녀와 이혼한 후 더 어리고 더 편애받는 자매, 바로 저의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계획했습니다. 1960년에 이르기까지, 통일교회 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의 이모와 어머니 둘 모두와 결혼하려는 저의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 저의 어머니를 미래의 통일교 “참어머니” 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에 따르면,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는 성경의 야곱이 이룬 바를 본뜨기 위해 최씨 가문과의 이 중대한 관계를 제대로 맺어야 했습니다.

13:00
유감스럽게도, 저의 아버지의 지나친 성욕으로 인해, 다른 여자들과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 수어번 생겨났고, 저의 아버지를 향한 저의 이모의 믿음은 점차 약해져서 결국 그녀는 1959년 후반 공식적인 약혼 이후 곧 통일교를 떠나게 됐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당연한 이유로 덮고자 했던 숨겨진 역사인데, 이런 일들은 교회가 배척할만한 일이며 그들이 신도들에게 1960년부터 가르쳐온 것과 절대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모가 파혼하고 난 뒤, 저의 아버지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명에 정말 중요했던, 7년간 그가 일궈온 관계가 그야말로 증발해버린 것입니다. 그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는 그를 실망시켰다며 저의 이모와 최씨 가문을 비난했고, 이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비난하는 문선명 목사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하지만, 그는 딜레마에 빠졌죠, 그는 “하늘의 예정” 을 지켜 1960년 봄, 그가 40살일 때에 결혼해야했습니다. 통일교 신도들은 숫자 40 이 중대한 우주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믿어서,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신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거의 4달 안에 말이죠.

전형적인, 대체하여 만회할 여자나 찾는 상황이죠. 그가 현재 문선명의 부인인, 韓鶴子 한학자를 아내로 간택했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겁니다. 최씨 가문에게 내쳐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권위와 소망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받아들인 저의 이모의 배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현재의 부인인 한학자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새로운 신부를 찾음에 있어 제시한 유일한 기준은, 여자가 “그 아무도 아닐 것” 과 부모의 허락이 필요없을 사람인 것이었습니다. 10대였던 한학자는 똑똑하고 근면하며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녀에겐 불행하게도, 그녀의 어머니는 무지하며 박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들어가기 전 하녀로 주방에서 일했던 성적 종교집단 모임에 함께 참석하곤 했던 유부남 간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한학자는 그녀 환경의 희생자였습니다. 한학자의 생부가 그녀를 그의 딸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허락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15:56
1964년으로 빠르게 넘어가면, 저의 아버지와 그의 세계 지배란 거창한 계획은 잘 흘러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자인 저의 아버지와 그의 완벽한 신부 한학자의 1960년 혼인이 있은 후로, 세상은 이를 거의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960년에 통일교 신도의 일반적인 신앙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통일교 신자들은, 저의 아버지가 한학자와 결혼하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온 세상이 기적적으로 무릎을 꿇어 그가 구원자이며 그의 아내가 만인류의 참어머니임을 인정하리라 실제로 믿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광신종교집단에서 벌어지는 마술적인 사고 증상이죠. 하지만 현실은 커다란 실망이었습니다. 문선명 부부의 맏이인 예진은 애초에는 “하늘의 왕자” 가 될 것으로 선포되었지만, 결국 딸이었습니다. 셋째인 해진은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습니다. 신도 증가는 침체되어 있었고 교회는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부와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번영했던 저의 할아버지 때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학자와 결혼한 것이 실수였고, 경로를 바꾸어 최씨 가문과의 원래의 계획 (또는 그가 “최씨 가문의 섭리” 라고 불렀던 계획) 으로 회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964년 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한 저의 어머니의 결정은 저의 아버지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게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저의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저의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한학자에게 숨 돌릴 공간을 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1960년 한학자가 저의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 줄곧, 교회 내 모든 사람들이 한학자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한학자와 저의 어머니는 아주 불편한 관계였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학자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저의 아버지와 최대한 많은 아들들을 갖도록 권한 이유이고, 아들을 한 명 한 명 낳을 때마다 저의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딸의 지배력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18: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아버지는 마음을 정했고 그의 계획을 확실히 하고 저의 어머니를 잃지 않기 위해, 1964년 서울 청파동 교회의 본부에서 통일교 인가 비공개 의식에서 저의 어머니와 결혼을 합니다. 저의 아버지에겐 무엇이 걸려있었던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는 만약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면 그녀를 영영 잃을 것이며, 이는 최씨 가문의 재정으로의 길 또한 잃는다는 것임을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그 자신과 통일교회를 저의 할아버지의 응징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것은 저의 어머니의 그와 교회를 향한 충성심과 헌신이었기 때문에, 저의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존재 자체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저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그녀와 자녀를 가짐으로써, 그는 야곱의 삶 또는, 통일교 신도들이 통칭 이야기하는 야곱의 경로를 본따는 일을 이루는 셈이며, 원리강론에 따르면 이는 그에게 아마도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원리강론은 당시 이후 변하였고, 오늘날의 원리강론은 초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많이 다릅니다. 그들은 현재 문선명 목사가 현재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 일어난 사실관계들에 맞추기 위해 원리강론을 손봐야만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미국에 도착한 뒤 바로, 저의 아버지는 1965년 그녀를 따라 미국에 곧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미국에 1964년에 왔고, 저의 아버지는 1965년에 왔습니다. 그가 말하기로는 그는 근본적으로 저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저의 아버지가 직접 한 말입니다] 고 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미국에 와서 저의 어머니를 임신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임신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그녀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65년 세 달 정도 머물렀습니다. 저는 다음해인 1966년 1월에 태어났고,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일이죠. 사실은, 저의 아버지가 저를 가짐으로써 최씨 가문의 섭리로 되돌아가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확연히 했기 때문에, 제가 태어났을 무렵 문선명의 현재 아내는 그녀가 물러나서 문선명의 아내로서와 “참어머니” 로서의 위치를 저의 어머니에게 넘겨주겠다고, 저의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머니의 동정심은 그의 한학자를 끌어내고 저의 어머니가 통일교 용어로 “참어머니” 로서 그녀의 정당한 위치에 서게 하리라는 계획을 막게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한학자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했고, 또한 한 명의 여자로서, 그녀는 한학자와 한학자의 어린 네 자녀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태어난 후 그녀가 저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만약 저의 어머니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그녀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했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뒤, 저의 아버지는 저의 어머니와 자녀를 더 갖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저의 할아버지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녀들을 뺏기고 다른 가족에게 키워지도록 포기해야 한다는 슬픔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21:35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이 통일교의 진짜 숨겨진 역사입니다. 제가 그 역사의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이 강단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제가 더 이상 이러한 비밀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런 날이 결국 왔다는 것에 마음이 놓입니다. 통일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과, 문선명 목사의 아내의 “참어머니” 로서의 정당성과, 원리강론에 따른 그 자손들의 “참자녀” 혹은 적자상속인들로서의 정당성 등을 생각해 볼 때, 왜 통일교운동이 이러한 정보들을 숨기려 했는지, 그리고 왜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법적 수단도 가리지 않았는지는 자명합니다. 저의 어머니가 통일교의 정당한 “참어머니” 임을 주장하는 것은, 문선명 목사의 아내 자신이 1966년, 1967년 시간대 즈음 그녀 자신의 위치를 저의 어머니에게 넘겨줄 준비가 되었을 때 이미 그리 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부로 가득찬 거대한 부와 특권과 절대적인 권력의 세계에 싸인 채 시간이 지남으로, 한학자는 그녀의 젊을 적 양심을 잃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키워진 그녀의 어린시절의 비참한 현실을 더하면, 한학자가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는 데에 있어 적절한 기술을 갖추지 못했음은 자명하고, 그 자녀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녀를 비난합니다.

저의 탄생의 배경과 시점을 보신다면, 제가 통일교운동의 “정당한 상속인” 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한학자가 만약 통일교운동의 예정된 참어머니였다면, 왜 저의 아버지가 그 “성스럽고 신성한” 결혼에서 걸어나와 저를 가졌겠습니까? 그리고 왜 당시 저의 어머니에게 그가 저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고 말했겠습니까. 뭐,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상황은 저를 아주 중요한 우주적인 녀석이 되게 하는 것이구요, 물론 통일교 논리 상 말이죠, 그리고 바로 저의 이복 형제자매들이 저를 싫어하거나 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문씨 가문의 폭력의 굴레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자기 도취증적 인격 장애와, 망상적인 절대 관념 (예를 들면 그들이 특별하고 그러므로 신도들과 다른 사람들을 마구 대해도 된다는 믿음) 때문이니, 저야 괜찮습니다. 이런 방식의 생각과 행동이 제가 그들과 공유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23:58
자, 다만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차기 구원자 혹은 그런 류의 무언가가 되기 위해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솔직히 저는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내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느껴야만 하는 필요성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니까요.

Donna: “뭐 그건 말만 그렇게 하는 것 같은데요.” [웃음] …

사무엘: “정말이라구요! … 저는 저의 한계점에 대해 지독히도 잘 알고 있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워지기 위해 저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특별한” 혹은 진실된 통찰력을 가졌다고 믿거나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자아도취에 빠지는 파멸에 이르는 길이죠.

저의 어머니와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만한 특이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이며, 그러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만, 하지만 이제 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이제는 그 이색적임을 고맙게 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여정은 길고 힘든 싸움이었으며, 이 방 안에 있는 많은 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원과, 정말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그 은혜와 사랑의 보편적인 존재 없이는 이뤄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우리 모습이 평범해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 존재에 영원히 새겨진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는 Khalil Gibran 의 이 말입니다: “너란 존재에 새겨진 슬픔의 깊이가 깊을 수록, 너는 더 많은 기쁨을 담을 수 있다.”

26:18
저는 우리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이 모든 경험에서 얻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ICSA 에 온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기 많은 SGA 들 [2세 성인들] 이 있고, 많은 학자들이 있고, 많은 일반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아주 강하고 고무적인 사인이 되었어요. 희망이라는 것이 있으며, 사람들이 회복하고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치유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기립박수.]

저의 어머니는 17살의 나이에 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 착취를 견뎌냈고,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당국에 체포당하고 심문당했으며,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억만달러의 유산을 포기했고, 비밀리에 아들을 가졌으며,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강제로 포기해야 했으며, 그리고, 지난 5년간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운동이 우리에게 주어야할 금액을 집행하기 위한 소송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많은 통일교 신도들처럼 우리는 압류와 파산 직전의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로부터 인정받기를 오랫동안 원해왔습니다만, 이젠 그가 자신의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적으로 저를 위해 있어주지 못했음을 이제 압니다. 제 스스로 아들을 가지면서, 나의 아들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고사하고 나의 아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저의 아버지의 삶의 선택들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정말로 애석하고 비극적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구원자 또는 전인류의 참아버지라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자신의 친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는 궁극적인 위선입니다. [박수]

이미 언급한 대로, 지난 5년간, 저의 어머니와 저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 운동이 우리에게 빚진 부분에 대한 소송에 휘말려왔습니다. 아시겠죠, 2천만불 (우리의 법적 청구 가치) 은 그 누구에게도 큰 돈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종교적인 공갈로 인해 강제로 빼앗긴 돈을 환수 혹은 되찾기 위해 통일교를 고소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저의 할머니와 최씨 가문이 1953년부터 시작하여 20년이 넘게 통일교회에 기부한 수백만불,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달러 가치로는 2천만불을 쉽게 넘길만한 가치의 그러한 돈에 대해 원칙적으로 우리가 같은 소송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구요, 그러니 사실 통일교 운동은 꽤 큰 할인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금 통일교 운동이 되어버린 그 무언가에 자원한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 인격의 광신단체에 자원한 바가 없고, 신도들을 영적으로 재정적으로 노예 삼아, 특히 일본에서, 대다수를 극빈자로 만드는 데에 자원한 바가 없고, 문씨 가문이 사는 아부로 가득찬 보호막을 행하고 유지하는 한국 중심의 지배 엘리트 계층을 만드는 데에 자원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 통일교가 생존 가능하고 정당한 단체가 되길 원한다면, 통일교는 그 이름의 “통일” 이라는 부분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신도들의 과반수 이상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운데 문씨 가문이 해외 은행계좌에 수억의 돈을 쌓아두는 데에는, 탐욕과 부패 외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른바, 자선은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교 운동이 하나의 세계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설립 명령을 말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응해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나서며 바란 것은 다른 사람들이 통일교의 권력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고무시키고, 애석하게도 통일교 운동이 되어버리고 만 이 거짓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수]


31:48
Donna 에게 발언권을 넘기기 전에 제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가 더 있는데요, 사람들이 제가 이렇게 앞에 나서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궁금해합니다. 제가 왜 洪蘭淑 홍난숙 과 Donna 를 위해 앞에 나서지 못했는지 말이죠. 이유는 간단한데, 제가 순진해 빠진 탓입니다. 당시 저는 저의 아버지와 어떠한 화해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교회 일을 떠나서, 결국 그는 저의 생부였고, 저는 아들로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정말 믿고 싶었고, 그가 절 걱정할 거라고, 신경을 조금이라도 쓸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기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소송 중, 상대방이 소송의 가치보다도 더 많은 금액을 변호사 비용에 소비하는 것을 보고 겪으면, 이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혈연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 특히 저의 어머니가 감수한 희생을 말이죠. 그게 저를 정말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시간이 좀 지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들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 지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구심점이 변한 시점이구요. 이것이 제가 오늘 서있는 이 곳에 오기까지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오늘 이 곳에 왔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