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タイゼムに掲載されたニュース記事のコピーです。
ハングル表記ですから写真で雰囲気だけでも味わっていただければと。
[제1부]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인노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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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토모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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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조선통신사 VS 본인방/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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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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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20세기의 영웅들/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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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기타니를 기억하는 1천명의 대국/히라츠카
[제7부] 19로, 1만 리/관서일대
S#1. 바둑 로드 이벤트의 종착역 - 히라츠카(平塚)
열흘간에 걸친 ‘21세기의 조선통신사’ 이벤트는 도쿄 남쪽의 소도시 히라츠카(平塚)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후지산이 보이고 바다와 인접한 히라츠카 ‘별의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의 칠석날인 7월 7일 이곳에서는 별의 축제가 열리는데 ‘한여름 밤의 크리스마스’라 불리며 일본의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10월 10일.
별의 고향 히라츠카에서 또 다른 별의 축제가 열렸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또 다른 별은 바로 영원한 바둑의 스승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이다.
바둑 인이 도시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곳은 아마 히라츠카가 유일할 것이다.
전철역에서 내려 광장으로 나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상징물이 바로 바둑기보 판이다.
기타니 9단의 명국을 큼직하게 소개해놓았다.
▲ 히라츠카역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기타니 9단의 명국.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일본의 전통과자 모나카 판매점이 보인다.
기타니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바둑 모나카가 진열되어 있다.
히라츠카의 명물이라고 한다.
▲ 과자판매점과 진열되어 있는 과자.
중심가의 하늘에 걸린 현수막.
사상 초유의 1천명 다면기 축제를 알리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천 명이 일제히 바둑을 둔단 말인가?
▲ 1천 명 다면기를 알리는 현수막.
거리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바둑통신사로 건너온 조훈현 9단을 비롯해 기타니 도장출신 일본 프로기사 70여명이 시민회관에 모여 완벽한 팬서비스를 위해 다짐하는 동안 시민들은 중심가에 천막을 길게 치고 번호순서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천막의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했다.
눈짐작으로 광화문에서 종로 3가에 이르는 거리가 천막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1천 개의 바둑판이 놓여있다고 생각하면 비슷하리라.
입장식이 환상이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히라츠카 시민 브라스밴드가 경쾌한 리듬의 행진곡을 연주하며 길라잡이를 맡았고, 그 뒤로 조훈현 9단과 70여명의 일본기사들이 한 줄로 걸어간다.
천막의 터널을 관통하며 양쪽에 대기 중인 바둑 팬과 눈인사를 나눈다.
기사들이 다가오면 벌떡 기립해서 허리를 절반으로 꺾어 존경을 표하는 시민들.
기사들도 감격해 활짝 웃는다.
실로 장쾌한 행렬이다.
400년 전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이러했을까?
필자와 함께 신주쿠에서 출발해 전철을 몇 번이나 바꿔 타고 히라츠카까지 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오랜 시간 서 있어야 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표정이 환하다.
▲ 필자와 조훈현 9단.
“바둑황제에 대한 의전이 소홀한데요? 한국 같으면 승용차로 안내했을 텐데 말입니다.”
“일본은 달라. 대접받으러 온 게 아니니까 각오해야지.”
“그래도 천 명이 환영해주니까 기분은 좋죠?”
“그러게. 생각보다 굉장한 걸.”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의 소감이 비슷하다.
바둑행사의 의전이 한국에 비해 엉성하고 스케줄도 빠듯하지만 그런 불편을 넘어 일본 바둑 인들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 일본기사들의 지도대국 모습. 다면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막을 통과하는 퍼레이드를 따라가면서 필자의 가슴이 쿵쾅거린다.
지도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표정에 경외심과 기대감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바둑축제가 마련되겠지.
이벤트를 위해 억지로 동원된 인원 말고 자발적으로 참가비를 내고 프로기사로부터 영광의 한 수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진정한 바둑 팬들의 잔치.
문득 클럽 A7의 홍시범 감독이 떠오른다.
이 정도의 세팅이라면 홍 감독도 거뜬히 해낼 것이다.
이윽고 본부석에서 개회가 선포되고 바둑통신사 조훈현 9단이 소개된다.
▲ 오다케 9단이 조훈현 9단을 소개하고 있다.
히라츠카 시가지가 울릴 정도로 큰 박수가 터진다.
모든 일본 바둑 팬들이 조훈현, 이창호의 위대함과 강력함을 알고 있다.
▲ 조훈현 9단의 다면기 모습.
▲ 일본기사들.
일본의 프로기사들이 각 천막에 배정되어 다면기를 두기 시작한다.
조 9단은 1번부터 딱 한 수씩 놓으며 끝까지 걸어간다.
모든 참가자에게 오직 한 수만 선사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기사들이 두고 있는 판에 가일수하는 방식이다.
기발하고 흥미로운 다면기 아닌가?
▲ 왕리청 9단의 공개해설.
다면기에 참가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 소공원에서 일류기사들이 다양한 바둑 이야기를 들려준다.
▲ 다케미야의 즉석강좌
명승부의 에피소드, 포석의 기초, 바둑계의 현황 등등 주제도 다채롭다.
히라츠카의 오후는 바둑으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 본부석의 바둑치어걸들
S#2. 기타니의 생가를 찾아서
기타니 9단의 생가는 전철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옛집은 사라지고 커다란 맨션이 들어섰다.
그러나 어김없이 기타니 선생의 표석이 서 있었다.
▲ 기타니9단의 딸이 사는 아파트, 좌측이 기타니의 3남
그 맨션에 기타니 9단의 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가 부친의 집과 유품을 물려받은 상속인이었다.
▲ 작은 책장에 보관 중인 기타니 선생의 책들.
장남은 의사, 차남은 법관, 삼남은 도쿄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하고 NGO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번 이벤트를 기획안 주인공이다.
▲ 시민회관.
기타니 9단의 유품은 시민회관의 1층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 기타니 9단.
기타니 9단은 근대바둑과 현대바둑의 교체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본인방 슈에이의 인퇴기를 통해 400년 동안 이어져 온 바둑가문의 세습에 마침표를 찍었고, 세기의 천재 오청원과 머리를 맞대고 포석의 혁명을 이끌어 낸 인물이다.
승부사로도 일세를 풍미했지만 도장을 통해 일본바둑의 영웅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한 바둑의 스승으로 통한다.
특히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 9단을 비롯해 김인, 조상연, 조치훈, 윤기현, 하찬석 등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었으니 한국바둑에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
▲ 기념관 안에는 문하생 명단도 있었다.
세고에 도장 출신이지만 조훈현 국수가 히라츠카에 와서 기타니 선생을 추모하는 바둑행사에 열심인 이유도 그런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였으리라.
▲ 당시 도장의 모습을 복원한 미니어처
S#3. 아직 바둑은 식지 않았다.
20세기가 저물면서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바둑의 기세는 한풀 꺾인다.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중국의 무서운 상승세에 치어 퇴락하고 만다.
원인은 많다.
일본의 바둑은 과연 이렇게 몰락할 것인가?
▲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신주쿠의 기원
▲ 실내에는 노인들만 가득했다.
기원을 가도 공개 해설장을 가도 바둑 팬의 평균 연령은 70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타니 도장 출신의 강자들이 좌충우돌하며 격돌했던 시대는 얼마나 박진감 넘쳤던가?
컴퓨터 이시다, 대마도살자 가토, 세력바둑의 다케미야, 실리의 화신 고바야시, 반상의 미학자 오오다케 등이 이중허리 임해봉, 투혼의 사나이 조치훈과 치고 받으며 명승부를 연출할 때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바둑 팬들도 열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장쉬나 야마시타, 이야마 유타 등이 힘을 겨루는 무대는 어쩐지 초라해 보인다.
그러니 바둑의 인기도 식어서 스폰서를 잡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이 번 ‘21세기 조선통신사’라는 기획으로 한국의 기사들을 초청해 멀고 먼 로드 이벤트를 기획한 이유도 양국의 친선과 함께 식어가는 일본 바둑의 화로에 불쏘시개를 장착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 기타니 9단.
그 기획에 기타니 도장 출신 기사들이 적극 호응해 마침내 환상적이고 감동적인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열도를 횡단하면서 지켜본 그들의 바둑.
필자는 ‘아직 식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
기록과 보존에 철저한 그들의 후예들이 그 빛나는 바둑 문화유산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일본 바둑이 흥해야 세계바둑도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 화에 계속)
내일은 최종회 제7부 : [19로, 1만 리] 편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