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칼럼에서는 일본에서는 분로쿠 케이쵸 에키(役)라 불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선택했습니다. 
조선건국으로부터 정확히 200년이 되는 1592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합니다
(분로쿠의 에키· 임진왜란). 

그리고 5년 후의 파병(케이쵸의 에키 ·정유왜란)과 합해서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릅니다. 
 

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고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천하통일을 이루어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적으로는 반대세력의 군사력을 약체화(弱体化)시켜 정권을 안정하게 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 지배라는 야망 실현을 위해 대외전쟁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를 처들어가는 돌파구로서 조선을 겨냥했습니다. 당파투쟁으로 인해 대외방위를 소홀히 했던 조선에 전국(戦国)을 살아온 토요토미군은 부산에서 상륙해서 두만강까지 단 숨으로 처들어갑니다.
조선왕은 바로 도성을 벗어나 도망가버리지만, 의병과 승병의 조국방위항전과 재건된 조선 관군과 명 나라의의 지원군들의 등장으로 조선은 세력을 회복시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눈부신 활약으로 드디어 일본군은 격파됩니다. 대의명분을 가지지 못 하는 토요토미군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구실로 철수했습니다.  
이 전란의 결과, 조선 온 나라가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국토는 황폐해집니다. 한국 각지의 유적지, 문화재의 설명에는 「임진왜란 때에 불탔다」, 혹은  「불 탄 후에 복원」이라는 문구를 자주 보게 됩니다. 400년이나 전에 일어난 전란이지만 견학하러 오는 아이들을 비롯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가깝게 느껴지는 『피해』의 역사입니다. 

또한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인명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토 호우코쿠 신사 앞에 미미즈카(耳塚)라는 사적이 있는데 토요토미군이 전공(戦功)의 증거품으로서 잘라낸 조선군 병사들의 코를 애도한 것입니다. 공로를 올리고 싶어서 애타는 토요토미군은 병사에 한하지 않고 일반시민의 귀나 코를 잘라 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비야(耳鼻爺)라는 말이 남아 있고 아이가 울면 「이비야(울면 귀 코를 뺏으러 오는 할아범)」이 온다고 달래기도 합니다. 어원 발상에 의문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 말이 지금도 임진왜란과 연결되어서 등장하는 것 자체에 전란의 잔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토요토미군은 조선의 우수한 도공들을 일본으로 포로로 끌고 갑니다. 끌려간 그들은 이국땅에서 고생 끝에 도자기 기술을 발전시켜 현재 일본각지 하기야키(萩焼), 아리타야키(有田焼), 사츠마야기(薩摩焼) 등 도자기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400년 전 일이며, 침략의 지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3대 영웅 중 한 사람입니다. 개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히데요시의 「조선출병」, 「분로쿠·케이쵸의 에키」라는 기술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명 나라 까지도 말려들게 하고, 동아시아 3개 나라에 정치적인 대변동을 초래한 국제전쟁이었습니다. 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한 짓이 침략이었음은 그 후로 300년이 지나 1910년 한국을 병합해서 식민지화하였을 때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읊은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바야카와·가토·고니시(모두 토요토미군 장군)가 이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의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
과거 히데요시가 이루어내지 못 한 「조선지배」라는 야망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국을 침략하고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저지르고 현재까지 지우지 못 하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에서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한일간 여러 토픽 인물을 통해서 이 칼럼에서 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