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EUNDAE NIGHT STORY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내 이야기를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나는 연애를 쉬기로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선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연애가 끝난 뒤로 누군가를 다시 알아가는 일이 너무 피곤해졌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묻고, 주말 일정을 맞추고, 답장이 늦은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의 짧은 말투 하나에 하루 종일 마음이 흔들리는 일.
나는 그 모든 과정이 지겨웠다.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아지는 대신 점점 조용해졌다.
주말이면 약속을 만들지 않았고, 소개팅 이야기가 나오면 웃으며 넘겼다. 누군가 호감을 보이면 기뻐하기보다 먼저 이유를 의심했다.
그리고 실제로 오랫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회사에서 부산 출장이 잡혔다. 해운대 근처 호텔에서 이틀 동안 행사가 진행됐고, 마지막 일정이 끝난 뒤에는 저녁 시간이 비었다.
동료들은 다 같이 회식을 하자고 했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혼자 바다를 걷고 싶었다.
밤의 해운대는 낮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파도는 같은 간격으로 밀려왔고, 해변을 둘러싼 건물의 불빛은 검은 바다 위에서 길게 흔들렸다.
나는 구두를 벗어 한 손에 들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사람들을 피해 나왔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랑 이야기를 시작할 사람도 아니고, 다음 날 다시 연락해야 할 사람도 아닌 누군가.
그저 오늘 밤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호텔로 돌아가려던 순간 부산에 사는 대학 동기 미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출장 끝났어?”
나는 대답 대신 해운대 바다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잠시 뒤 미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 혼자야?”
“응.”
“또 힘들어서 혼자 빠져나왔지?”
“어떻게 알았어?”
“너는 힘들수록 더 혼자 있으려고 하잖아.”
미나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목소리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는지 미나는 한 장소를 알려줬다.
“연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내일 연락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그냥 오늘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와.”
미나가 보내준 해운대 호빠 깐따삐야 페이지를 천천히 살펴봤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과 조명이 낮게 깔린 공간이 보다.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요란한 술자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도 한동안 예약 화면을 닫지 못했다.
낯선 남자와 마주 앉는 일. 누군가에게 내 기분을 드러내는 일. 그것은 오랫동안 피하려 했던 일과 너무 닮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와 대화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예약 문의를 남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색 벽과 부드러운 조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넓은 소파와 반짝이는 테이블이 정돈돼 있었고, 음악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될 만큼 잔잔했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아 가방 끈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뒤 여러 명의 남성 호스트가 차례로 들어와 인사했다.
누군가는 밝게 웃었고,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나를 웃게 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를 선택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술부터 권하지 않았다. 먼저 잔에 물을 따르고 조명의 밝기가 불편하지 않은지 물었다.
“부산에는 여행으로 오셨어요?”
“출장이요.”
“그럼 오늘이 마지막 밤이네요.”
“네.”
“마지막 밤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던데요.”
나는 피식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아니요. 오늘 손님 표정이 그래 보여서요.”
너무 정확한 말이라 잠시 당황했다.
처음에는 출장 이야기만 했다. 행사 준비가 힘들었다는 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피곤하다는 말, 호텔 침대가 생각보다 편했다는 말.
그는 내 말을 끊지 않았다.
내가 문장을 끝내지 못할 때에도 다음 질문을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대화 속에서 서둘러 웃고, 서둘러 대답했는지를 그제야 알았다.
“연애는 안 하세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쉬는 중이에요.”
“얼마나요?”
“계속.”
그가 웃었다.
“그건 쉬는 게 아니라 그만둔 것 같은데요.”
나도 따라 웃었다.
“사람 만나는 게 피곤해서요.”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니면 다시 상처받는 게 피곤했던 거예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내가 오랫동안 피하고 있던 것이었다.
“둘 다인 줄 알았는데, 아마 두 번째인 것 같아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람을 싫어한 건 아니네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사람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내주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놓고,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고 믿었다.
“오늘 여기 온 것도 사람을 만나려고 온 건 아니에요.”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누군가를 만나러 온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숨기지 않거든요.”
나는 웃었다.
그날 밤 우리는 꽤 오래 이야기했다.
좋아했던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남아 있던 습관,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순간, 누군가를 다시 믿는 일이 무서워진 이유.
그는 해결책을 말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그건 힘들었겠네요.”
그 정도의 말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더 좋았다.
나는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내 말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들어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시간이 깊어지자 음악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좋아하는 노래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오래전에 자주 듣던 노래를 골랐다.
처음에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러다 후렴에서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다.
그도 옆에서 함께 불렀다.
노래가 끝난 뒤 내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낯선 사람이랑 이렇게 오래 이야기한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그가 웃었다.
“낯선 사람이라 가능했을 수도 있죠.”
그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서로의 내일에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아도 됐다.
밖으로 나오자 해운대 거리는 한결 조용해져 있었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다시 연애하고 싶어졌어?’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아니. 아직은.’
그리고 한 줄을 더 보냈다.
‘그래도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닌가 봐.’
그날 이후로도 나는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 다가오면 무조건 멀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일을 겁내지 않았다.
닫아놓았던 문을 활짝 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잠금장치를 하나 풀어둔 정도였다.
그 시작은 해운대의 어느 늦은 밤,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낯선 남자와 오래 이야기했던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