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警察

濟暗

 

 



남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보통 직업을 말한다. 월급으로 꾸린 삶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알바는 좀 다르다. 똑같이 돈을 벌지만, 알바는 직업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서 알바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취준생이라거나,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다거나, 혹은 알바하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데, 사정이 어려워서 잠깐 알바한다고 말한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아직은 일반적인 한국에서, 이처럼 직업은 곧 자신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직업이란 것도 알바 같은 마인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무슨 얘기냐면, 내가 '경감 / 경정 퇴직했소!' 하는 말로 자기소개가 끝난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 그러시군요!' 하는 것 외에 재미가 없다. 기껏해야 여자들은 '총 쏴봤어요?'라거나, 좀 짖굳은 사람들은 '시체 봤어요?'라고 묻는 식이다. 퇴근하고나서도, 심지어 퇴사하고나서도 '나는 경찰로 살았어'라는 어필로는, 슬프지만 별로 득이 없다. 앞에서는 웃으며 얘기하지만, 뒤에서는 욕만 안 하면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김복준 교수님 같은 경우는 정말 특이한 케이스다. 복준 아재 이래저래 욕 많이 드시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로의 정체성을 유지하시면서 국민께 봉사한다는 사명감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왜냐하면 나 같은 싸구려 인간은 흉내도 못 낼 마인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하수의 같잖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우연히 이걸 보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생각할 거리가 되면 좋겠다. '나의 직업이 없을 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여질 것인가' 이 말씀이다. 그래서 알바처럼 회사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나는 지금은 뻗치기나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순마 타고 다닐 거라든지, 지금은 순마 타고 다니지만, 나중에는 본서에 갈 거라든지, 지금은 본서에 있지만, 나중에는 중개사를 해볼 거라든지, 혹은 전문직을 하겠다든지.

 

 

물론 지금의 직업을, 죽기 직전까지 거쳐갈 어떤 과정의 일부로 본다고 하여, 직업에 대해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알바라고 커피 대충 만들거나, 음식 잘 못하면 바로 잘린다. 어쩌면 잘리지 않기 위해서 더 눈치보며 일한다는 측면에서는, 알바가 경찰 같은 직업공무원보다 더 충실한 면도 있겠다.

 


모쪼록 계속 고민해야 한다. 내가 직업 외에도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계속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찮은 하수 주제에 좀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나라는 존재를 소개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다. 나라는 세계가 한 그루의 나무라 한다면, 나는 가지를 받드는 큰 줄기고, 직업은 가지다. 물론 경찰이란 직업이 줄기일 수도 있다.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좀 비약이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습관처럼 견민, 견민 거리는 것은 정말 듣기가 싫다. 그건 내가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안타까워서다. 물론 누가 봐도 개차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널렸다. 그리고 견민이란 용어는 견찰이란 비하용어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 애환을 왜 모르겠는가.

 

 

다만, 그런 경멸적 타자인식의 부작용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만든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정상인으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 경찰인 나와 내가 아닌 타자로서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인 주취자나 범죄자, 혹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가 볼 때 그 사람은 회사 밖에서 배울 게 없어진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나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아닌 사람들을 개 같다고 인식하는데, 그런 말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오만해지고, 오만해지면 계속 회사에 매이게 된다. 회사를 받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사 나가는 순간, 자신도 개가 되니까.

 


다시 큰 줄기로 돌아오자면, 소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회사가 마련한 기성복인 제복에 맞춰져야 하냐는 것이다. 나는 그런 국가적 사명에 충실하려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보전은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퇴사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매력적이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견민, 견민 거리겠는가? 일생을 경찰로 헌신하시는, 살아있는 경찰영웅이다.

 

 

다만, 그렇게 사명에 충실한 사람도 있는 것이고, 또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유의해야 할 것은, 지금 다니는 회사 이후에 나아갈 세상에 대해서, 지레 경찰과 / 비경찰로 나누어 인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변호사, 검사, 판사, 의사, 회계사 같이 사회적으로 소위 잘나가는 직업군의 사람들에 대해서 경멸적 감정을 가지고 일하는 게 아니라고. 지구대 들어와서 소리 지르거나, 똥오줌 싸거나, 칼 들고 설치는 못난 사람들에 대해서 경멸하는 것이라고.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듣기에는 너무 옹졸하다. 어떤 말로 상대를 정의했을 때, 심지어 그 말이 비인격화라면, 누구는 그렇고, 누구는 아니다라는 예외를 둔다는 것 자체가, 논리의 불완전성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니 힘이 들 때는, 회사 이후에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 또 그 속에서 내가 이루어 나갈 것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내 직업이 아니고서도 어떤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나는 이게 정말 중요하다 생각한다. 욕 하려고 회사 다니는 거 아니지 않는가? 알바가 일하면서 계속 투덜대면, 그 알바가 다른 일인들 제대로 하겠는가? 그러니 힘들수록 나의 발전을 위한 빛을 보아야 한다. 좀 자존심 상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변호사들 일하는 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으실 거다. 아마 많으실 거다. 어떻게 하였던가? 쓸데없는 말 하지 않는다. 감정적이지도 않다. 심지어 진짜 견민이란 말도 아까울 정도의 인간쓰레기를 변호해도 마찬가지다.

 

 

그거 왜 그렇겠는가? 그거야 당연히 죽을 때까지 변호사로서 계속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지금 자기가 맡는 사건은 그냥, 앞으로 맡게 될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의뢰인에 대한 신의 못지않게 자신에 대한 케어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경찰 뿐만 아니라 다른 공무원도 마찬가지고, 나아가 직업을 가진 모든 사회인들도 계속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뭐, 간단히 얘기하면, '앞으로 뭐 할 건지 고민한다'는 으레 하는 말이지만, 한 사람의 일생은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보다 더 잘됐으면 좋겠다.

 


당신과 나의,

 

 

멈추지 않는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