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통해 드러나야 할 문제
이순신은 근대, 근대이후에 인류사에 등장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때, 부정적인, 어떤 근본적인 시대사조의 차이를 보여주는 인물일 뿐이다.
매월 음력 1월 1일, 정월 초하루.
이순신이 제사를 올리는 장면.
왕과 그 혈족의 생일이나 기일에 제사를 올리는 장면.
영화나 만화 끝날 때까지,
제사 올리는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유교적 마인드에 지배되어 있던, 이순신과 동시대의 의식세계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
점괘를 보려던 것도 여러번 반복해서 다루어야 한다.
장수로서의 업무수행.
주요일과가 각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수하 간부들이 찾아와 조회를 받는 것이고,
그 행태에 조금이라도 낌새가 수틀리거나 게으름이 있으면 가차없이 곤장으로 버릇을 다스리는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
이순신 본인도 이런 방식으로 여차없이 당했다.
조선의 대신들이 명나라 군사령관에게 곤장을 맞는것, 권율이 원균을 곤장질 한 것도 다룰 수 있으면 다뤄야 한다.
난리가 난 초기에, 밥은 굶지 않겠지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자발적으로 찾아왔던 평민들의 모습이나 산에서 모여있다 내려 온 중들의 모습도 그려줘야 하며, 이들을 닥달하는 이순신의 모습도 그려내야 한다.
중들은 곧 실망해서 참여를 후회하고 기회가 있으면 빠져나갔을 것이고, 특히 격꾼으로, 대다수 자원해서 진지를 찾아 온 평민들은 격꾼, 노젓는 용으로 활용되었을 것인데, 이들이 아주 심각한 수준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탈영하는 일에 온통 신경쓰고 있었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순신의 모순.
첫 실전경험, 옥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가지고 있던 판옥선의 우월성을 알아챘고, 지피지기가 되면서,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조선인 체격에 눈을 떴을 터인데, 이순신은 이들을 어디까지나 계급의식에 갇혀 도구로서만 활용하려 하였고, 도망치다 걸리는 경우, 무조건 본보기로 잔혹하게 살해해서 시체 역시 병영 내에 전시하여 모욕 하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원균이 병사들 억지로 징발하느라고, 사람 납치하고 다니던 것을 비난하던 입장이더니, 이후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본인도 격꾼이 없어 사람을 납치하던 것을 허락한 것도 드러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익숙해진 조선인들이 어부, 어업으로 돈을 좀 벌려 하는데, 이들을 철저히 제압해서 돈을 뜯거나, 병영에서 사람을 빼 냈다는 트집질을 하면서 처벌한 모습, 해적질로 13척의 수군을 군산지역에서 복원시킨 모습도 그려내야 한다.
첫 전투를 미루면서 문서로 조약한 것도 아닌데, 목포진에 있던 이억기 전라우수사가 오기를 기다렸던 정황도 그려내야 하며, 무엇보다 이순신 본인이 사실대로 적어 놓은, 다른 배를, 이억기 부대의 선발대로 착각하고, 바다에 출진해 있던 모든 병사들이 기뻐하던 해프닝도 중요하게 표현해 내야 한다.
조선왕조가 보유한 수군인프라로서 판옥선, 화포 발사대가 장착되어 있는 판옥선에 대해서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은 오랫동안 활용하지 않아, 즉, 민간교류에 신경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해안가에 사는 것들 자체를 아예 왜적들과 한통속으로,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천시하며 살던 성리학 질서가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현 중국공산당이 타이완에 대해서 부리고 있는 하나의 국가라는 고집은 거짓말, 비열한 짓임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의식 차이, 지배권 계층의 의식차이가, 민간의 모습을 바꾸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명나라나 조선이나 민간 레벨에서는 생산성이 없어, 항상 소외되어 범죄자 집단이 되는 걸 방치해 왔다.
이들의 자발적인 교역을 두고, 바로 해적질이라면서 토벌하려는데 쓰던 것이 바로 판옥선의 모습인 것이다.
육중한 선체로 민간인들의 배를 부수고, 가까이 근접해 아예 박살내 버리는 용도로 화포를 고안해서 활용한 것이다.
지금의 국가관으로 판옥선과 화포를 바라봐선 안될 것이다.
그나마 이순신은 일단 적들을 맞아 싸워 보기라도 해서, 지피지기를 통해, 해전, 연안해전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감을 잡기라도 한 것이지,
경상우수사, 경상좌수사 원균, 박홍입네 같은 자들은 아예 싸워 보기도 전에 지레짐작, 자신들이 병영을 일구어 본 적이 없기에 당연한 지레짐작으로, 아예 배가 왜적에 의해 활용되는 것이나 막겠다면서, 파괴해 버리고, 도망치기나 한 것보다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조선수군이 가진 왜의 수군에 비해 가지고 있던 유리함을 알아채고, 이룩한 성과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무모한 진격을 유인해서, 쫓기는 척 하다가, 반격하여 크게 성과를 올린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와키자카의 실수를 기점으로, 왜군들 역시 수군에서의 열세를 알아채고, 해전을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이순신은 이후로 크게 성과를 올릴 일이 없이, 그냥 해안가를 순찰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정보전에도 서툴러서, 상대 왜적 장수들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이 없었고, 이는 조선인 지도층들의 일반적이 모습이었다. 오히려 고니시 유키나가의 노력에 의해 교류 상대방이 된 조선인 대신을, 단지 왜놈과 상대했다는 이유만으로 터부시하려는 옹졸함을 보일 뿐이었다.
왜의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다. 카톨릭세례를 받은 점, 무리한 지시를 하는 주군, 도요토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알아서 전란을 마무리 하기 위해, 외교성과를 거짓으로 꾸미려 한 것.
반면에 좋은 비교가 되는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전형적으로 일본의 의식구조가 옳다고 인식하고 있는 대로, 무조건 주군의 뜻에 따라 전진을 일삼느라고, 정작 후방을 안정화 시킬 세력이 없어서 일본군은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해안가를 따라 군수물자를 수송하려던 계획이 있었으나, 이순신 때문에 가로막혔더라고 해도, 가토가 2군으로서, 고니시의 필요에 따라 후방을 안정화 시키는데 주력했으면, 전쟁을 지속할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가토는 그 자신이 설정한 대로, 울산성이 포위당해 말라 죽어야 할 위기를 정면돌파하고, 귀신의 몰골이 되어 울산성 방어에 성공했던 것이겠다.
여기에 대비되는 조선의 기득권 계층들이 보인 모습.
모두 도망가버린 것이다.
명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조승훈 부대의 괴멸,
그러나 이 경험,
왜병을 상대해 본 경험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여송은 동일한 실수를 한 것이다.
곡물징발. 임진왜란 시기, 대책없이 도망가던 조정이, 명군이 도착하자 다시 조직을 만들어 가면서, 얼마나 서민들에게서 곡물을 징발했을까?
광해군이 나눠 받은 조정으로 얼마나 성과를 올렸을까?
가토를 암살하려던 고니시의 책략이, 이순신의 조선인스런 무지몽매함에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 그것이 오히려 일본을 후퇴시키게 만들었던게 아닐까?
고니시 같은 인재가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일본이라는 집단의 성격을 고착화시킨 것이겠다.
고니시 같이 열린 인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면, 이후 진척된 근대 일본이란 사회, 에도시대가 매우 달라졌을 것이겠다.
자신이 지켜낸 전라남도 해안지역을 드디어 시간을 내서 순회하기 시작한 이순신. 그러나 선조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정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트집질로, 단순히 가토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한 것이다.
이순신의 마지막 행차.
명의 이여송, 진린, 마귀 등의 장수들에게서 보이는 이윤추구성향.
현 시대 일본인의 낮은 인식수준으로,
여전히 고니시는 중간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나쁘고, 가토 같이 무조건 적으로 버티며 싸워온 장수는 우대받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조의 아들들을 잡아 넘겼다던 국씨, 사을화동이라는 진도에서 왜놈들과 함께 해적질을 했다는 조선인.
물론 일본 쪽에서도, 가토의 무도한 지시에 혐오를 느끼고 조선에 귀화한 항왜.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북조선 기관원들의 더러운 짓에 혐오감을 느끼고, 어렵게 남한으로 내려왔으나 남쪽에서도 역시 더러운 짓을 당한 유오성 남매의 경우.
이미 명과 왜의 장수들 간에 적당히 타협이 되었는데, 오히려 중간에서 점점 더 심하게 꼬장질을 하기 시작하는 이순신.
이순신은 표적이 되어, 퇴각하는 고니시 부대가 집중해서 린치를 가한 것이겠다. 어리석은 것이다. 진린과 같은 명나라 장수에게는 굴종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이제와서 다 끝난 전쟁.
수하 장수들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혼자 고집을 부리다 죽은 것이겠다.
일본인스런 모순, 중국인스런 한계, 조선인스런 한심함이 섞여 어우러 진 것. 명나라 부대에 의지하려다 남원인들이 크게 살육당한 것이겠고, 진주성의 경우도, 조선인들끼리 해보려다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이겠다.
지금도 계속되는 자아의 모순. 임진왜란에서 그 아키타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정작 자신들의 얼굴, 모순된 자아를 되돌아 보지는 못하는 것이겠다...
- 前ページ
- 次ペー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