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西東京水曜行動
毎月第1、第3水曜日は西東京水曜行動を行っています。
現在、コロナの影響で駅前での水曜行動は自粛中です。
今日は中部地域のオモニのメッセージを紹介します。
※日本語訳は写真の下にあります。
ウリハッキョに対する熱い思いを感じてください。
#朝鮮学校に無償化適用を
#こどもたちの未来のため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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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모교가 있다.
전교생 9명이던 목조교사2층짜리 자그마한 우리 학교가 나는 좋기만 했다.
나무계단은 오르내릴 때마다 소리나지 않은적이 없었고 나무틀창문은 항상 열기 힘들었다.
선생님 세분이 두 학년씩 담임을 맡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했다.
복식수업이란 45분동안에 두 학년을 동시에 따로따로 가르치는것이다.
아무리 학생수가 적어도 두 학년의 담임을 맡아 수업도 두배로 준비하시느라 힘드실텐데 휴식시간이면 운동장에서 함께 놀아주시는 선생님들이시었다.
어머니들은 학교운영을 위해 김치를 손수 담아서 일본사람들에게 매주 판매하러 가셨다.
수업시간에 들려오는 어머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즐거워 보이기만 하였다.
학교땅주인은 근처에 사는 어느 일본할아버지이셨는데 매달 땅값을 받으러 오는 모습이 학생들에게는 지주놈처럼 보여 그분이 오실 때면 저마다『지주놈이 왔다』고 떠들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학교를 지키려는 마음이 그 말로 나타난것 같다.
제주도사투리를 쓰시는 할머님은 아들한테서 편지가 올 때마다 학교에 찾아오시고 선생님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셨다.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시는데 우리가 무슨 말인지 전혀 못알아들어서 늘 선생님이 통역하셨다.
구수한 사투리를 배우고 싶어서 그럴듯하게 흉내면 할머님은 재미나게 웃으셨다.
원족은 가정용차 2대로 갔고 운동회는 일본학교 운동장에서 일본학생들도 함께 교류를 깊이면서 경기하였다.
참관수업도 학예회도 모든 학교행사에는 학부모와 우리 지역동포들이 계셨고 누구나가 우리 아이처럼 항상 응원해주셨다.
따뜻한 우리 학교가 정말 좋았다.
그런 동포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나의 모교는 내가 졸업할 때 페교되였다.
어릴적 나의 꿈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것이였는데 학생시기에 벌써 자기 꿈을 빼앗긴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12살 어린 나이에도 페교라는 의미를 똑똑히 알았고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좌절감과 안타까움,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졸업식날에 계속 울었었다.
선생님과 아버지,어머니들,동포들이 소리내여 울었다.
초급부졸업식은 눈물바다 기억밖에 없다.
어른이 되고 그리움에 못견뎌 학교가 있었던 곳을 찾아갔는데 학교가 있어야 할 곳엔 4호밖에 안되는 2층짜리 아파트만 있어 허무감에 휩싸였다.
이 좁은 땅에 우리 학교가 있었다고?
귀한 추억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에게 아무 의미없는 아파트만이 달랑 한채 있으니 한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지주놈 나와라 우리 학교를 돌려라!고 웨치고 싶었다.
그 할아버지가 나쁜건 아닐테지만…
나에게〈우리 학교〉란 사랑스럽기도 하고 힘이 솟구치고 따뜻하고 좀 아프기도 한다.
내가 부모로서 녀맹성원으로서 학생인입사업이며 고교무상화와 유보무상화투쟁 그리고 학교를 위한 모든것에 힘을 기울이는것은 두번 다시 우리 학교를 잃지 않고 싶기때문이다.
아이들의 추억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집처럼 언제든 찾을수 있는 〈우리 학교〉를 위해서 내가 할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오직 할뿐이다.

【日本語訳】
皆と同じように私にも大切な母校がある。
全校生徒9人(小学生)で学んだ、木造2階建ての小さなウリハッキョが私は大好きだった。階段は上がり下がりする度にギシギシと音を立て、木枠の窓は開けるたびに難儀した。
三人の先生が学年を2つずつ受け持ち一つの教室で複式授業を行っていた。
生徒が少ないとは言え、学年の異なる授業をそれぞれ同時にこなし、疲れた素振りも見せず休憩時間にはいつも外で一緒に遊んでくれる先生たちだった。
オモニたちは学校の運営の手助けをしようと、毎週キムチを漬けては販売に走り回っていた。
そんなキムチ作りの日の授業中に聞こえてくる、オモニたちの明るく元気な笑い声がとても楽しそうで心地よかった。
毎月地代を集金に来る地主の姿に、悪者が来たかのような気持ちになって友達と騒いだりした。子供心にも学校を守りたかったのだろう(笑)
遠足は家庭用車2台で出掛け、運動会は近隣の日本学校の運動場でその学校の生徒たちと一緒に競技を行い交流を深めた。
授業参観も学芸会も全ての行事には保護者だけでなく、地域同胞たちが集い誰もが私たちを我が子のように暖かく見守り応援してくれた。
そんなウリハッキョがとても愛おしかった。
同胞たちの愛情がたっぷりと詰まった母校は私の初級部卒業と同時に廃校となった。
母校で先生になるという私の夢が無残に奪われてしまい胸が締め付けられた記憶が蘇る。12歳の私でも廃校の意味はしっかり理解し、何も出来ないもどかしさに悔しさと悲しみとが入り混じり、泣きじゃくっていた。大人たちも声を出して泣いていた。
小学校の卒業式は涙の渦の記憶しかない。
大人になった頃、懐かしさに学校の跡地を訪れたが、そこに建てられていた小さなアパート(住居4軒の)を見て跡地の狭さに驚きと虚無感で呆然と立ちすくんでしまった。
私にとっての<ウリハッキョ>は、力を沸き立たせくれる場所であり、愛おしくて暖かく、そしてちょっぴり辛くもある。
オモニとなった私が今、ウリハッキョを守るための様々な取組や高校無償化、幼保無償化実現のための活動に力を注ぐのは、他でもなく二度とウリハッキョを失したくないからだ。
子どもたちの未来が明るくなって欲しいから。
成長していく子どもたちがいつでも自分の家のように帰ることのできる<ウリハッキョ>のためにできる事、やらなくてはならない事を只ひたすらにするの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