独立運動家 ~ 趙炳玉 ~ | みょんじゃさんのブロ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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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 나무위키

趙 炳玉は、第一共和国時代の大韓民国における政治家で、1960年大統領選挙における民主党の候補者。

ユグァンスンの父と一緒に戦った独立運動家でもある。

 

 

조병옥 

 

 

 

 

 

 

 

 

 

 

 

 

1919년 4월 아버지 조인원은 유관순의 아버지인 유중권 열사와 함께 천안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는데 그때 조병옥은 아직 유학 중이었다.[9]

1925년 귀국한 뒤 신간회 총무부장을 맡아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빌미가 된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당국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어 한용운 등과 함께 배후 혐의로 수감되어 수년간 옥살이를 했다. 1932년 조만식과 함께 경영난에 시달리는 조선일보 인수 운동에 참여하여 조만식이 사주가 되고 그는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 국장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구류 통산 280일)을 언도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이후 1941년 보인광업주식회사(輔仁鑛業株式會社)에 이사로 취임해 있었다가[10]# 광복 직전에는 서울의 친구 집에서 극도의 빈궁을 겪으며 지내다가# 광복을 맞았다.

한편으로는 일제 말기에 부역 혐의가 있다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친 지적이다. 조병옥은 수양동우회 사건 때 전향서를 쓰고 광산업을 불하받으면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었다. 조병옥이 부역 혐의를 받는 이유가 1941년 10월 22일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라는 친일 단체의 발기인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에 신흥우최린 등과 함께 참여하여 銃後保國(총후보국;대동아전쟁의 후방에서 나라를 지키자)는 찬성 연설을 1차례 하였다는 것이 전부인데##2 이런 것 1~2건 정도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단정짓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조병옥이 일제 말에 반대 급부로 광산업을 불하받고 지냈다는 것으로 보면 그가 전향서를 쓰고[11] 편하게 지냈다는 점으로 사람들로부터 '유휴분자'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12]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극성 및 지속적으로 수십여 차례를 활동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2.3.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직후에는 흥사단 계파로서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한국민주당으로 활동하면서 안재홍과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비난했는데 조병옥은 한반도에 막 입성한 미군 고위 장교들에게 '여운형과 안재홍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돈을 받아먹은 친일파 집단'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13] 이에 대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송건호는 '조병옥을 비롯한 한국민주당 세력은 전형적인 기회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역사 왜곡을 주도한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 警務局)을 접수한 미군이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를 신설하는 과정에서 조병옥을 비롯한 친미파 한인들을 초대하여 중용했다. 빠르게 승진[14]한 조병옥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전국의 치안을 다스리는 경찰총수로서 제주 4.3 사건에 서북청년단을 보내 군ㆍ민을 가리지 않는 강경진압을 한 것이 훗날의 비판을 샀다. 그의 입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온건파인 김익렬 9연대장이 최대한 유혈 사태를 줄이고자 평화 협상을 교섭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조병옥 휘하의 경찰과 서청이 소위 '오라리 방화 사건'을 조작하여 평화 협상을 깨뜨렸으며 조병옥은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축출시켰다.[15] 이 기간에 친일 경찰 채용 파동이라고 친일 경찰을 그대로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가 남긴 망언은 '그들은 pro-jap(친일파)이 아닌 pro-job(전직)'이었다.[16]

조병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해서 극도로 불신했으나 자신의 은사였던 김규식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고 그가 김구를 따라 방북하려 하자 정치적 자살 행위를 왜 하시려 하냐며 여러 차례 극구 만류하였다. 김규식은 탁월한 식견과 예측력과 달리 행동에 있어서는 좌지우지되기 쉬운 성격이었고 결국 방북을 택함에 따라 김규식은 이후 남한 정계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경무부장 활동 이후 그는 장면 등과 함께 파리 UN 총회에 파견되어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한 외교적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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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에서 총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 대표단.[17]

한국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고수하며 기권하던 인도 측을 설득하기 위해 자와할랄 네루를 방문하였고 네루는 "국토가 양분된 대한민국을 왜 승인해야 하느냐"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 조병옥은 "우리 국토가 양분되었다는데 귀국은 3분[18]되지 않았느냐"고 받아쳤고 네루는 "우리는 그러한 조치를 수락한 거다"고 대답했다. 조병옥은 "자율적으로 수락(accept)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수락(acquiesce)한 게 아니냐" 하여 네루를 벙찌게 했고[19] "우리 국민도 소련이 이북을 점거하고 내놓지 않기에 부득이하게 3분의 2의 한국인들이 단독 주권 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고 설명하였다. 장면은 일국의 수상에게 그렇게 몰아붙이듯 설명하면 되었겠냐고 책망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도는 기권에서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니 조병옥은 만족하고 돌아올 수 있었는데 100% 조병옥의 언변만으로 그리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20]

2.4. 제1공화국[편집]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사회당 조소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조병옥 측은 경찰 병력을 이용해 선거 초반부터 조소앙 측 선거 운동원 83명을 서울성북경찰서에 구금하는 등 유세 방해를 일삼았고 선거 하루 전날인 5월 29일에는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내용을 적은 벽보를 곳곳에 붙이고 삐라를 뿌리는 등 조소앙에 대한 마타도어를 일삼았으나[21] 그럼에도 불구하고 40.19%의 득표율 차이를 보이고 국회의원 자리를 내줘야 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제5대 내무부장관으로서 피난을 포기하고 포위된 대구 내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버티었다. 조선인민군의 9월 대공세 때 빨치산 및 일부 정찰대의 대구 시내 포격 때도 피난을 가지 않고 대구역을 비롯한 대구 각지를 돌며 피난을 막는 취지의 연설을 했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열변으로 민심 안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적 덕분인지 정전 협정 체결 후인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손인식 후보에 48.85%의 압도적인 득표율 차이로 당선되었다.

잠시 자유당 소속이 되었으나 이승만이 6.25 전쟁의 휴전을 앞두고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 사건에 비판적인 태도를 나타내자 상대편으로부터 테러를 당해 폐인이 될 뻔한 적이 있었고 붕대를 감은 상태에서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다. 1990년대 말 당시 테러에 참가한 KLO출신 이창건의 수기가 발표되었는데[22] 수기에 따르면 테러는 경찰서장이 혼내주자는 이야기를 했고 최종적인 목적은 조병옥도 일부러 자기 집을 부숴달라고 했고 약간 손을 봐줬다는 이야기다. 그외에 KLO는 조선일보 기고에서도 조병옥 테러를 아주 자랑하고 다녔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사건을 한국현대사의 일면 정도로만 소개하고 넘어가지만 언론인 출신의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김태환 하버드남가주한인동창회장은 이를 불필요했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이미 1953년 6월 8일(석방 10일 전)에 UN측과 공산측에서 휴전 교섭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문제를 "자유 송환 방식"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반공 포로 석방에 격분한 중공군이 7월 13일부터 약 일주일간 한국군이 담당했던 중부 전선의 금성천 돌출부(Kumsong River Salient)에 한국전 참전 이후 최대 규모의 공격을 가해서 한국군 장병 약 3만 명이 죽거나 다친(공산측은 6만 3천으로 발표) 한국전 발발 이후 단일 전투(금성천 전투 또는 7.13 공세로 불린다)로는 최대의 인명 피해(Casualties)를 당했던 것이다. 반공 포로 석방 사건으로 인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미군 장병들의 사상자가 총 5천 명에 달했기에 이에 분노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인 에버레디 작전(Plan Everready)을 구상하기도 했다. # 물론 포로석방 문제만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승만의 실제 목적은 하염없이 미뤄지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압박에 있었기 때문에 이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 보기는 어렵다. 결국 미국도 이승만이 반미주의자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에버레디 플랜을 철회했다.

조병옥은 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당 구파가 되었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75.4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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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29일, 미국을 방문한 조병옥[23]
1960년 당권을 민주당 신파의 리더 장면에게 넘긴다는 조건으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대적한 야당 측 대통령 후보로 나왔는데[24] 선거를 몇 달 앞두고 병이 나서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수술 중 사망하였다. 후보 등록을 하고 나서 위병이 심해져서[25]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가서 복부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 발병증으로 사망. 2월 12일까지만 해도 증세가 회복되고 있었고 건강 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병원 측 대변인도 "뜻밖의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 신익희도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가 선거를 앞두고 사망[26]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병옥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이 암살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27] 조병옥의 갑작스런 서거로 이승만은 단일 후보가 되었기에 대통령에 자동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령의 이승만이 죽으면 당시 헌법상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에게 대통령 지위가 자동 승계되는 것을 우려한 자유당이 이를 막기 위해 실질적 당수인 이승만 몰래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