済州島(チェジュド)出身で詩人・書藝家であった李哲(イ・チョル)先生が、東日本大震災から1年を迎えた3月11日、お亡くなりになられました。韓国式に数えると90歳の大往生でした。

李哲先生は戦後一貫して、在日韓国・朝鮮人の運動にかかわってこられました。とりわけ『季刊三千里』の発行人として、日本と韓国・朝鮮との複雑によじれた糸を解きほぐし、相互理解を一歩一歩深めていこうとする先生の活動は高く評価され、在日韓国・朝鮮人社会において、あるいは日本と韓国・朝鮮との真の友好を願っている日本人の間で、いわば〝精神的シンボル〟のような存在でした。

実は私自身、1988年、ソウル・オリンピックが開催された頃から、先生の謦咳に接する機会に恵まれ、近くにお住まいになられていたということもあって、何かというとお目にかかり、お酒の大好きな先生の隣りに座って、お話を伺うことができました。20数年間に渡る長い長いご指導に、親しく接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です。

考えてみると、私がこうして韓国・朝鮮半島にのめり込むことになったのも、李哲先生のご指導あってのことだったと改めて思います。今でも先生のお声は、潺潺と流れる谷川の水音のように、脳裡からはなれません。むしろ静かに眠る先生のご遺体に接してからというもの、繰り返し心の中に響いているのです。
追悼文というと大げさすぎてそぐわないのですが、これから折をみて先生との思い出を綴ってみたいと考えています。しかし、今のところ考えがまとまりませんし、もう少し余韻を反芻していたい気持ちもあります。

そこで、先生の故郷である済州道の新聞「済民日報」の特集記事を掲載し、また翻訳してみたいと思っています。この記事は昨年12月にやはり済州道の女流詩人ホ・ヨンソンさんのインタビュー取材を受けた時のもので、このお写真はおそらく最後の写真だと思われます。病魔に冒されながらも最後の最後まで故郷を想い、後進たちを励ます李哲先生のメッセージです。

これから心を込めて翻訳させていただきます。

李哲先生! 安らかにお眠り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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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선이 만난 '사람'] 재일동포 시인·서예가 이 철 ・・・・・・・
2011년 12월 22일 (목) 15:25:14 허영선 ysun6418@hanmail.net

"계간 「삼천리」는 당대 재일 사회의 역사였지"
 고향에 가면, 불망의 친구 묘를 찾을 것이라 했다. 그는 읊는다. "고향하면 한번은 가고 싶다. 남의 나라에. 아니 내 고향에." 시 100수를 외는 사람. 시와 서예와 노래와 악기에 능한 사람. 재일 사회의 담론이었던 재일 종합 문예지 계간 「삼천리」지를 13년간 낸 발행인. 재일동포 시인이자 서예가 이철. 한 시대의 전설, 이철을 두고 일본의 저명한 작가 시바료타로는 '칼날같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었다. '추사체의 대가' '불망의 시인' 이철. 그를 만났다. 12월, 동경의 한 역전에서. 놀랍다. 눈빛은 맑고 빛났다. 소년의 눈처럼. 그는 불망을 노래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전적이며 열정에 찬 문어체 어투. 선생은 여전히 충격이다. 마음의 마그마가 폭발할 것 같다. 노장이 품은 기억의 저장고는 대체 어디까지인가. 저 깊은 기억의 우물. 어떻게 유효한 것일까. 

朝鮮半島を見れば日本がわかる !  한반도를 보면 일본이 보인다  !■ 전 재일 계간 「삼천리」지 발행인 이철은
 시인, 서예가. 1924년 제주시 출생. 목포와 광주에서 공부함. 일본 동경 거주. 조선신보 기자. 재일조선인 종합문예지 계간 「삼천리」 발행인 겸 편집위원 역임. 88년 동경과 오사카서 서예 개인전. 조선어 시집 「여명」 「변방야화」 등. 교사 생활, 일본 평화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 제주도4·3사건 50주년기념사업실행위원회 공동대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3년간, 일본사회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담론을 주도했던 계간 「삼천리」에서는 종간호까지 시를 연재했다. 노신의 '조선을 생각한다' 수필 번역.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문예활동 개관'도 번역하는 등 중국어 번역도 했다. 일본에서의 서예 첫 개인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제주도 근·현대 100년의 인물사를 집필하고 있다.














"인간은 귀소본능이야. 고향엔 부모형제 아무도 없지만. 지금도 세 살 때 꿈을 꾸지. 사람의 생애란 것은 육체란 것은 부모의 분신이요. 그 사람의 지식, 모든 것은 정신세계의 연장이야. 그걸 알아야해." 순서 없다. 선생의 단문은 고향에서부터 시작된다. 고향아, 너 본지 너무나 오래다. 그의 기억의 회로는 옛날로 돌아간다. '동으로 송대정 북으로 이판관'의 손지(손자)였으나 이제 고향은 쓸쓸한 풍경이리. "고향체험이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5살 때 일본 와 가지고 소학교 다니다가 전남 목포와 광주 서석 학교에서. 왔다갔다 했어." 일본에 정착한 것은 1947년 스물세살 쯤. 허나 그에게 기록된 고향은 눈부실만큼 환하다.
 "옛날엔 제주에 말타는 사람들이 많았어. 댓 살 때 주위의 사람들, 동네 아버지 친구 얼굴이 어떻게 생긴건지도 알고 있어. 도남집이란 사람이 있었어. 아주 독한 할머니가 있었어." 할머니, 어머니가 일본에 있었다. "모시러 왔는데…그러다 한국전쟁이 났어. 기가 막혀."
 흘러 흘러서 팔순, 육신의 생을 붙이고 있는 일본 땅. 뜨거움과 냉철함의 삶, 풍파와 격랑. 재일의 삶. 한 생애를 돌아보면, 계간 「삼천리」지를 만들 때처럼 뜨거웠던 시기가 있었을까.

 # 50호 넘긴 계간 「삼천리」 시대의 발언
 재일의 역사였다. 전설이 됐다. 최초의 재일 종합 문예지 계간 「삼천리」지. 민족적인 대명제 아래 탄생된 재일 사회의 이슈였다. 발언이었다. 그것의 위상은 확고했다. 일곱명의 편집위원 가운데 제주출신 영향력은 컸다. 재일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역사학자 강재언 등 거물들이 편집위원으로 포진해 있었으니. 또한 재일의 대표적 시인 김시종, 2세작가 양석일, 아쿠다가와상 수상자 현월 등 당대의 필력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으니.
 "분단의 비애가 있잖아. 세대변화가 오면서 '재일'사회는 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양식도 다르니까 그 문제도 있고. 7·4공동성명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남과 북이 손잡고, 총련이나 민단이나 손잡고,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자며 만들던 계간지였어. 가격도 높았고, 광고도 받지 않고. 지금도 꿈같은 일이야. 대부분 동인지가 3호, 5호면 끝나는데 50호까지 갔다는 건 역사상 드문 일이야."
 1975년 창간한 계간 「삼천리」는 총 50호까지 냈다. "한번에 500만엔 들어간다. 순전히 후원금으로 만들어야 했어. 많이들 도와줬지."
 일본 사람도 글을 썼다. 불란서, 몽골,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도 명성이 높았단다. 아쉽다. 왜 종간했을까? "제작비가 200만엔 이상이 올랐어. 어떻든 잘 견뎠지. 일본에서는 10주년을 넘기니까 놀라는거지. 그때가 되니 돈이 많이 들어. 그만해야 했어."

 # 광주항쟁에 반응했던 시 '불망의 광주'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던가. 해방되니까 살았구나 하는데 그게 되는가. 조국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던 청춘. 청소년기를 살았던 공간. 80년 광주의 5월은 그를 아프게 했다. 시로 단숨에 광주를 불러냈다. 불망의 광주를. 계간 「삼천리」의 제23호(1980년 가을)에 광주를. 제24호에서는 '조국'을 불렀다. 조국에 대한 그의 노래는 소리죽여 내뱉는 신음으로 절절하고, 애달프다. "조국이라는 이름의 당신/당신에게 나는 가슴을 쥐어뜯깁니다/그러나 나는 태어난 이래/당신으로부터 참된 사랑 같은 것을/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어긋난 수레바퀴처럼/언제나 엇갈리고 놓칠 뿐/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재 시를 두고 일본 입교대학교의 고도긴페이 교수는 종간호에서 이렇게 쓴다. "그의 시 60줄의 한 자 한 자는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이철의 시는 잡지의 존재를 포용하고, 아울러 명예의 장르를 획득한다"는 것. "편집 발행인인 이철은 「삼천리」에 매호 시를 연재했다. 계간 「삼천리」는 조선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기본방향을 설정한다. 1972년 7·4공동성명에 있던 통일된 조선의 실현을 위한 절절한 희망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철의 시 가운데는 거듭 되풀이 하면서 통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철의 시는 격조가 높고, 조선의 풍토, 문화, 역사 재일의 인생을 기품 있는 이상과 서정, 단정한 리듬과 정열을 다해서 읊어주고 있다."
 그의 시는 낭송하기 쉽다. "나는 시란 모름지기 마음의 감정과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 율동을 주어야 되지, 지가 혼자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다. 울림. 그에겐 시를 쓰는 것 못지않게 시를 낭송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스무 살에 제주에서 펴냈던 시 속에 떠오르는 시 한편. 그가 다시 읊는다. "너는 너 나는 나/인생산맥은 그저 망망하기만 하누나"

 # 오랜 세월도 한때 유행하는 옷감처럼
 어려서부터 글을 잘 쓴다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여러 서체를 쓴다. 그의 서예는 과연 어디서 왔을까. "아버지한테 글이 많았어. 추사체도. 어릴 적부터 추사체에 익숙했지. 김 추사 같은 사람 글씨. 추사체를 쓴다는 것은 너무 외람되지만 모신다는 것이지."
 그의 서예는 힘 있고 활달하다. 섬세한 필치, '추사체의 대가' 로 불리우는 이철. 제주의 서예가 고 김광추 선생과는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그의 서예가 주목을 끌었던 때는 1988년 동경과 오사카에서 열린 개인 서예전때. 거의 그가 처음이었다, 그의 독특한 서체는 일본에서 놀라운 화제. 사람들도 엄청나게 관람했다. 작품 200점이 나갔다니. 당시 시바료타로가 일본 대표로 초청됐다. "「탐라기행」을 쓴 일본의 작가 시바료타로와는 아주 친했어. 밥도 먹고 죽도 먹고. 제주도 이야기도 많이 했어."
 이철.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란 의미. 연변 작가 김학철과도 가까웠다. 폭넓은 인간관계망으로 살아온 삶. "사람이 살아가는 건 인간관계가 중요해요. 인정. 인지상정이야. 인간다운 소양도 교양도 있어야지."
 인생의 30대, 가장 뜨거웠다. 중국말도 할 수 있었던 그는 평화위원회의 간사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노신의 '조선을 생각한다'는 수필이 있는데, 내가 그 놈을 번역한다고 고생했지.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문예활동 개관'도 번역했어."

 # 제주 근·현대사 100년 인물사 완성이 꿈
 그에겐 지금도 미완의 꿈이 있다. 집필중인 제주도 인물백년사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인물을 끄집어 내는 것. 400자 원고지 500장 정도.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근·현대사 인물들은 늘 살아있다. "고경흠은 이론이 높았고 아주 어른이지. 우리 집에 와서 반년 쯤 살았던 김명식은 사회주의 사상가로 '조선의 지식인에게 고함'이 있지…." 연도, 이름, 기억은 끝이 없다. "60년 동안에 걸친 재일조선인 운동사에서 인물을 간추리면 제주도 사람들이 많아. 구한말부터 약 100년에 걸친 제주 인물사를 완성하는 것이 꿈이야. 제주도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일본, 상하이, 베이징, 불란서에서 성과를 알린 사람들을 조명하고 싶어."
 6년전, 그를 만났을 때였다. 문화예술, 정치활동, 언론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말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갑절 살아가면서 아직도 통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참을 수 있지만, 외적으론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해방이 되어도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들, 어릴 때 부모와 이별하고 사는 사람들, 상당히 많은 재일 제주인들 가운데는 아주 밑바닥에서 생활하면서 애들 공부시키는 사람. 백에 한 사람은 유학 와요. 제주도 동포들이 경제관념이 단단해서 쓸데없는 돈을 안 쓰고 열심히 모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우수하지. 조선반도에서 민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어디냐. 제주도야. 우리 민족은 우아한 민족성으로 인격을 도야해 나간다는 걸 잊어선 안됩니다."
 어려서 그의 주변엔 문화예술인들이 많았다. 끼 많은 집안에서 자랐던 이철. 한 시대를 풍미한 그에게선 예인의 풍모와 격조가 흐른다.
 자신의 인생? 그의 함축적 언어. '났다. 사랑했다. 썼다'. "외국에 살면서 고향에 대한 정겨운 마음은 깊어가지만 풍화되어 가는 게 많아요. 사람에 대한 미의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해요." 맑은 눈으로 청춘의 기질로.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생의 파고를 견뎠다. 간절한 것은 자기 태생의 땅에 한번 가고 싶은 것이리. 4·3의 참담했던 가족사와 한국전쟁, 재일의 삶. 기억의 섬 고향은 이름만으로도 비애와 미감이 교차한다. 눈발을 머금은 동경의 하늘, 바람은 찼으나 선생의 정신은 파랬다. 늙지 않았다. 고향을 바라보는 시선, 청춘의 순정을 담은 결기도 전혀 늙지 않았다. 아니, 더 뜨겁다. 초롱초롱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의 말처럼 두 눈에 흙이 들기 전까진.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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