疲れた | きりまるのブログ

きりまるのブログ

私の覚え書き
関西弁で わかりにくいところは ご容赦下さい

プリントアウトしちゃったよ

 

‘댓글’이 아니라 ‘글’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보세요. 같은 글입니다. 🐣🐥🌏🚀🌐❤️

나는 ‘페미니스트’다. 어떠한 권위가 내게 ‘자격증’을 발부할지는 모르겠으나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320자의 트위터나 그림으로 말하는 인스타그램의 부작용으로 집단 난독증을 앓고 있는 신(新) 인류에게는 매우 길고 어려운 글이 될 것이고, 글을 통해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다. 수익과 소득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먹잇감이 되겠지- 아뿔싸! 
그들의 가난한 영혼을 차마 다 안을 재간이 없어 비통하다. 자연을 글로 옮기는데 가상세계에서 내 영혼이 다칠까 걱정되어 날선 방패를 먼저 세우는 일이 참으로 비참하다.

그럼에도 쓴다. 경향적 어휘와 자극적 이미지를 총알처럼 남발하며 전쟁을 치르는 세상에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기에는 내 안의 문학소년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다. 
싸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써왔다. 그래서 쓴다. 피눈물로 당신에게 나를 보낸다. 이것이 내 ‘글’이고, ‘나’다. 물리고 뜯기고 찢겨 조각난 채로 이 세계를 부유하는 것들은 글이 아니라 나다. 흥겨워하지 말아라. 익명이 그토록 명예로운가. 기자라는 이름의 명예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배가 아니라,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내 이름은 ‘엄홍식(嚴弘殖))’이다. 내가 짓지는 않았고, 무엇을 심으라고 지으신 지는 모르겠지만 엄할 엄(嚴)에 클 홍(弘)심을 식(殖)을 덧붙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 역할은 있었는데 ‘엄홍식’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자아 찾기 여행의 고난이 눈앞에 펼쳐졌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체는 노화의 속도를 올리고 있지만 정신은 확장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중 2병의 당연한 실체다. 나는 항상 삶이 어렵다. 매 순간이 새것이고, 그 시간에 속한 모든 내가 새로운 나여서.

아버지는 나를 ‘똥개’라고 불렀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어릴 때의 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즐겨 하신다. 귀한 아들은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사는 거라고 한다. ‘귀한 아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그때까지는 내 조부모들의 귀한 자식들인 내 부모가 가진 자식들이 딸 둘 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제삿날이면 엄마는 제수(祭需)를 차리느라 허리가 휘고, 아빠는 병풍을 펼치고 지방(紙榜)을 쓰느라 허세를 핀다. 일찍이 속이 뒤틀린 소년이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상하고 불평등한 역할놀이’. 제사가 끝나면 엄마는 음복상을 차리고 작은엄마와 누나들은 설거지 같은 뒷정리를 함께 도왔다. 집안의 남자들이 ‘성’에 취해 허세를 피우는 ‘상’에 여자들이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과 종교의 역사와, 각종 인간 사상이 합작하여 빚어낸 남존여비의 ‘전통’과 그 전통이 다시 빚어낸 인간 사회의 참상은 내 집안에서도 자랑스러운 골동품으로 전시되었다. 유난하고 폭력적인 그 풍경은 뻔뻔하게 펼쳐졌지만 자랑스럽게 대물림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다. 그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다.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 의문들로 뒤틀린 나는 차마 뻔뻔한 그 풍경들을 뻔뻔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구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이 시대가 내게 여전히 의문들을 남긴다는 사실이 나를 증명한다. 의문이라는 고통, 두려움으로 빚어진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나는 짐승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고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귀한 아들이다. 나의 귀함이 고작 ‘아들’이라는 ‘성’에 근거한다면, 나는 그 귀함을 기꺼이 벗고 허기진 짐승처럼 이 도시를 어슬렁거려야 하겠지. 아마도 ‘개새끼’로 사는 일을 피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개새끼’가 아니려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아들이어서 귀한 게 아니다. 딸이라고 비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아들딸들이, 모든 부모의 자식들이 다 귀하고 존엄하다. 누가 아니겠는가.

나는 페미니스트다.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이 글은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유행을 빌어 하는 ‘인간’과 ‘관계’와 ‘세상’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인간’을 탐구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한 배우가 글로 전하는 ‘인상’이다. 쉽게 닿지 않겠지만 내 식으로 하겠다.

‘차이’는 ‘차별’의 장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는 ‘차별’ 없이 모든 다른 존재들과 이 위대한 기술을 통해 연결되고 싶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진정한 ‘관계’를 갖고 싶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배우’의 역할을 이 질서 안에서 삭제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이상과 같지만 나는 그래서 ‘배우’로 존재하고 이곳에서 ‘나’로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전쟁, 종교,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져온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 냈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강자의 폭력은 성의 차이뿐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구성하는 사회 안에서 소수자를, 약자를 향한다.

모든 아들딸들;인류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고통이 아니라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로 우리는 교류가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시대의 전쟁은 더 이상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구시대의 교리, 질서가 아닌 이 시대의 정신과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을 멈추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돈의 거래’와 ’경쟁을 통한 성장’이 낳은 기술이 인간성을 삭제하는 참상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우리의 감정은 현실과 가상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는 혼란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를 연결하는 <소셜 미디어>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첨단 기술의 비약적 성장과 함께 <가상 세계>를 펼쳐내며 <현실 세계>와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각종 최신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며 인간 사회와 인간상 그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우리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다. 난해한 용어 따위를 다 지워버리고도 여러분은 지금 이 세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여기는 ‘facebook’이고, 당신은 거기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있다. 타인과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관계망은 인류 문명의 위대한 성취다. 이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전쟁’하지 말고 ‘품앗이’하며 평화를 찾아야 한다.

전쟁은 두려움의 상징이다. 비로소 우리를 하나로 연결한 기술의 세계에 매몰되어 모든 개인과 개인이 서열다툼 하듯 경쟁으로 전쟁을 치른다. 어떠한 승자도 행복하지 않은 전쟁. 그것은 ‘최면’이다. 어떠한 승자도 영원하지 않은 이 시대. 대한민국 전 대통령도, 초대기업 재벌 3세도 구치소에서의 시간을 태우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타인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질서도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우리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빚어낸 현재가 우리를 잠식하지 않고 우리를 연료나 부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우리 스스로 더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각성해야 한다.

나는 나다. 당신이 당신인 것 처럼.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이겨내기 위해 힘쓰고 싶지 않다. 당신과 연결되고 싶고 잘 지내보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떠하냐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당부한다. 더 이상 ‘기술 혁명’에 끌려가지 않고 당당하게 주도하며 ‘정신 혁명’을 이루자고. 그 방법과 길을 이 편리한 기술 안에서 함께 찾아가자고. 그것이 기술이 아닌 인류 진화의 열쇠가 아니겠는가.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コメント」ではなく「文」をご覧になりたい方は、こちらから見てください。同じ文です。 🐣🐥🌏🚀🌐✨❤️
私は「フェミニスト」だ。どのような権威が私「資格」を発行するか分からないが、信念と愛と時代精神を込めて「フェミニズム」を話すしたい。 320文字のツイッターや絵で言うインスタグラムの副作用として集団失読症を患っている、新人類にとって非常に長く困難な文になるだろうし、文を介して人を見て、別の人にとっては「他人」の「世界」を覗く崇高なものになるだろう。収入と所得を希望者には、餌になるだろう - しまった!
彼らの貧しい魂は すべてに工夫がなく悲痛である。自然をグロー運ぶの仮想世界で、私の魂がダチルカ気になって鋭い盾を前に立てることが全く悲惨である。
それでも書く。傾向的語彙と刺激画像を弾丸のように乱発し、戦争を受ける世界で勝利の喜びに陶酔なるには、私の中の文学少年が非常に悲しいからである。
戦ったことはない。だから書いてきた。だから書く。血の涙であなたに私送る。これは私の「文」であり、「私」だ。かまトゥトギゴ引き裂か断片化のままに世界を浮遊するもの文ではなく、豊かである。興じるてはならない。匿名このようミョンイェロウンガ。記者という名前の名誉はまた、どうか。私たちは、獣ではない。船ではなく、魂をサルチウォなければならない。
私の名前は「オムホンシク(嚴弘殖))」である。私犯さはなかったし、何を植え書くよう造られたかは分からないオムハルオム(嚴)に大きくホン(弘)心式(殖)を加え祖母が建ててくれた名前である。私は保守の歴史と伝統を誇る大邱で2人の姉を持つ息子であり、台をつないで祭祀を過ごさなければならする長男とした家に生まれ「差別的愛」を果たして住んでいた。役割はあった「オムホンシク」はなかった。誰そのよう自我検索旅行の苦難が目の前に繰り広げられた、まだ進行中だ。身体は老化の速度を上げているが、精神は、拡張を停止しなかったので、それは私の中二病の当然の実体である。私はいつも人生は難しい。毎分、新しいものであり、その時間内のすべての私の新しいやので。
父は私を '犬」と呼んだ。恥ずかしいまだ故郷に行くと、父は私幼い時のその呼称で呼ばれること楽しんでおられます。貴重な息子はそう呼ぶ長生きだろうする。 「大事な息子」
小さな姉の名前はハングルで「滴」である。それまでは、私の祖父母の貴重な子だ私の両親が持っている子が娘の両方の外なく次には必ず息子を産んだとおばあちゃんがそう造られたとする。 「オム滴」かわいそうできれいな名前です。
命日であればお母さんは除数(祭需)をチャリのに腰が反り、お父さんは屏風を広げ、地方(紙榜)を使うため虚勢を咲く。かつて騙しねじれ少年だった私の目にはそう見えた。 「以上で不平等なロールプレイ」。祭祀が終わるとお母さんはウムボク上に返って、小さなママと妹は、お皿を洗うような後片付けを一緒に助けた。家の男たちが「性」に取って虚勢を吸う」賞」に女性が入り込むことはなかなか難しいことではなかった。
戦争と宗教の歴史と、さまざまな人間の思想が合弁してもたらした男尊女卑の「伝統」とその伝統が再びもたらした人間社会の惨状は、私の家でも誇らしいアンティークに展示された。有難うし、暴力的なその風景は厚かましく広げたが、誇りに相続されないだろう。誰そのよう私「ママ」と呼ばれる存在の子宮に考案されて、彼女の痛みで世の光を見た人間である。そんな私フェミニストではなくて強引に生きていく工夫がない。私の母は解放されるべきである。疑問にねじれ私どうしても恥知らずその風景を臆面もなく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ず、そのような旧時代の遺物が展示されたこの時代が私にはまだ疑問を残すという事実が私を証明する。疑問という苦痛、恐怖にもたらされた存在が、人間ではないか。
私は獣ではない。私は人間であり、私たちの母の父の貴重な息子である。私貴艦がせいぜい「息子」という「性」に基づいた場合、私は貴艦を喜んで脱いお腹獣のように、この都市をさまよっゴリョヤだろう。おそらく「畜生」に住んでいることを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瞬間が多い。 「畜生」ではないしよう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私の人生なのかもしれない。すべての人間は、それ自体で尊いある。息子続い貴重なものではない。娘と単調はなおさらではない。すべての息子、娘たちが、すべての親の子が多耳し尊厳である。誰ではないか。
私はフェミニストだ。ハハ。ないかどうか、なんて主張するかどうか、なんて呼ばれた私はちょうどこのような人である。そして今になって告白の首謀この記事は、迷惑を掛け流行している仮想世界でのその「フェミニズム」の話ではない。その流行を借りて「人間」と「関係」と「世界」の私の物語である。 「人間」を探求して「世界」を理解し、それを反映している」の演技」をアップにしたした俳優がグローバル伝える「印象」である。簡単に触れませんが、私のようにする。
「違い」は「差別」の障壁となって、私たちを引き離している。私は「差別」なしに他のすべての存在と、この偉大な技術を介して接続されたい。 「社会関係網サービス」の中で、真の「関係」が欲しい。それは最終的には、「俳優」の役割をこの秩序の中で削除させることもある。不可能な異常と同じだから私は「俳優」として存在して、ここで「私」で存在する。
男性と女性。他のタイプの人間が戦争、宗教、支配の歴史の中で取得した生物学的機能と社会的役割の違いが差別を作り出した。違いを差別に転換する強者の暴力は性の違いだけでなく、すべての個人が構成する社会の中で少数者を、弱者を向く。
すべての息子、娘たち;人類はまだ様々な形態の「戦争」を払っている。痛みではなく、利便性と楽しみのために作られた技術で、私たちは交流ではなく、戦争をしている。この時代の戦争は、もはや男性の専有物ではない。この時代には、旧世界の教義、秩序がなく、この時代の精神思想が必要である。私たちは、「戦争」を停止し、そこから再起動する。 「お金の取引」と「競争を通じた成長」が生んだ技術が人間性を削除する惨状を、私たちが目撃していないか。人間と私たちの感情は、現実と仮想の多次元的に交差する混乱の世界で道を失って漂流している。
他人と私の間を接続する<ソーシャルメディア>と、そのような<通信>が一つの社会をなす<ソーシャルネットワーク>は、先端技術の飛躍的な成長と一緒に<仮想世界>を広げ出して<現実の世界>と多次元的に交差している。これは、スマートフォンに代表される各種最新デバイスを使用する現代人の生活を反映し、人間社会と人間像そのものを完全に変化させた。私たちは、二つの世界を同時に生きていく。現実と仮想が混在された全く新しい「新世界」だ。難解な用語などを消してしまっても、あなたは今、この世界を十分に検出することができる。ここ「facebook」であり、そこに「存在」するため。
私たちは、オフラインとオンラインという二つの世界に同時に属している。他人と光の速度で接続されている関係網は、人類の文明の偉大な成果である。ここで、人間は、もはや「戦争」せず、「助け合い」、平和を見つける必要があります。
戦争は恐怖の象徴である。初めて私たちを一つに接続した技術の世界に埋没して、すべての個人と個人が序列争いようの競争に戦争を行う。どのような勝者も満足してい戦争。それは「催眠」である。どのような勝者も永遠ではない、この時代。大韓民国前大統領も、初代企業財閥3世も拘置所での時間を乗せているこの時代。私達が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他人でもなく技術もなく秩序もないかもしれない。私たちが本当に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私たちが私たちを失っているという事実である。私たちの人間性を、私たちの精神を失っているという事実である。歴史もたらした現在、私たちを侵食せずに、私たちを、燃料や部品に転落させずに、私たち自身よりよく生きることができように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覚醒しなければならない。
私は豊かである。あなたのように。ハハ。ないかどうか、なんて主張するかどうか、なんて呼ばれた私はちょうどこのような人である。私はあなたの勝ち抜くために力を入れてたくない。あなたと接続され、たく元気見たい。そして聞きたい。あなたはどうかと。私同時代を生きていくの両方に私の物語を伝える。そして頼んする。もはや「技術革命」に引かれて行くことなく堂々とリードし、「精神革命」を成し遂げ眠っている。その方法と道をこの便利な技術の中で一緒に探して行こうと。それ技術ではなく、人類の進化の鍵ではないだろうか。
ゴマなさい。マイムタ子供が!

 

ほぼ直訳ですが

お役に立つかなと思い

載せときます

アインさんの 文章

 

ちょっと疲れますよ

いや 疲れました

 

では 参考にどう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