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oshusokuhou.com/archives/31211439.html
:名無しさん@13周年:2013/08/27(火) 02:54:31.60 ID:8ZlC6gUV0
日韓併合がなければ在日白丁は今でもこうだったんだよ 新婚初夜覗き
新婚初夜覗き(しんこんしょやのぞき)とは、
新婚初夜の寝室を覗き見する韓国の伝統的な風習である。
韓国語では、シンバンヨッポギ(신방엿보기)という。
シンバン(新房)とは新婚夫婦の初夜の寝室のことで、ヨッポギは覗きという意味である。
韓国では伝統的に、新婚初夜には親戚や近所の人々が
寝室の障子に穴を開けて中を覗き見する習慣があった。
覗きの習慣が生まれた理由については、早婚が盛んだったため
幼い夫婦が失敗しないように見守るためであるとか、
新婚夫婦を悪鬼から守るためなどといわれている。
最近では住宅事情の変化などにより、覗きは行われなくなってきている。
http://ja.wikipedia.org/wiki/%E6%96%B0%E5%A9%9A%E5%88%9D%E5%A4%9C%E8%A6%97%E3%81%8D
韓国の新郎いじめ
新郎扱い(しんろうあつかい、신랑다루기)は、
新郎を集団でいじめる大韓民国の伝統的な風習である。
結婚式の後で新郎が新婦の家に初めて行った時に、新婦の親戚や近所の人達が
集団で新郎を取り囲み、肉体的精神的ないじめを行う。
地方によって、いじめ方が違うが、次のようないじめが行われる。
新郎の足首を縛って、逆さ吊りにして、棒で足の裏を殴り続ける。
ひどい場合には、殴られた新郎は歩くのが難しくなることもある。
また、新郎に漢詩を作れと強要し、下手だとケチをつけて馬鹿にする。
新婚夫婦の性的な事を根掘り葉掘り問い詰めたり、あれこれと質問責めにする。
宴会の金を持ってこいと言う。などのいじめが行われる。
そうするうちに、新婦の家で料理や酒を持ってくると、いじめをやめて宴会となる。
現代では披露宴の会場でいじめが行われることもある。
http://ja.wikipedia.org/wiki/%E9%9F%93%E5%9B%BD%E3%81%AE%E6%96%B0%E9%83%8E%E3%81%84%E3%81%98%E3%82%81
シバジ
シバジ(朝鮮語:씨받이)とは、
朝鮮半島において、李氏朝鮮中期以来存在した風習の一つで、
家の跡継ぎとなる男子を得るために、子供を生むための女性を雇うこと。
また、それに従事する女性をさす。現代においての代理母と似た概念である。
日韓併合後に禁止された。
씨(シ)が「種」を、받이(パジ)が「受けること(もの)」を意味することから、
日本語で「種受け」と訳されることがある。なお、動植物の採種も同じ語で表すことがある。
http://ja.wikipedia.org/wiki/%E3%82%B7%E3%83%90%E3%82%B8
試し腹
父親が自分の娘が妊娠できるかを確認する為に、性行為をして孕ませる行為。
昔の朝鮮では 父親の権利が絶対だそうです。
女は女房でも 娘でも奴隷扱いだったそうです。
嫁に出す娘が、確かに妊娠できる事を証明するために
親兄弟で強姦して妊娠した状態で嫁に出す。生まれる子供は奴隷身分。
大人まで生き延びる確率も少ない
生まれてこなければ良かったとの苦しみの一生を過ごすことになる。
「女は子を産む道具でしかない」朝鮮では、
「道具(女)が不良品(不妊症等)であってはならない。
故に、『これこの通り、妊娠できる体でございます』ということを証明するために、
「種男」という男に娘を犯させ、妊娠した状態で輿入れさせる」。
これを「試し腹」と言います。
産まれてくる子供は、当然夫の血を引いていないため、
妻と同じ奴隷的な身分しかなく、 結婚はおろか大人になるまで
成長する者も稀だ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
自分の娘を血縁の近い男(兄や叔父)に妊娠させて、
妊娠できる女と証明させて 嫁がせる儒教思想が暴走した悪しき習慣だそうです。
奴隷制度
奴婢は品物のように売買・略奪・相続・譲与・担保の対象になった。
かれらはただ主人のために存在する主人の財産であるため、
主人が殴っても 犯しても売り飛ばしても、果ては首を打ち落としても何ら問題はなかった。
それこそ赤子の手を捻るように、いとも簡単に主人は碑女たちを
性の道具にしたものであった。奥方たちの嫉妬を買った碑女は打ち据えられたり、
ひどい場合は打ち殺されることもあった。
外観だけは人間であるが主人の事実上の家畜と変わらなかった碑女たちは、
売却・私刑はもちろんのこと、打ち殺されても殺人にならなかったといい、
韓末、水溝や川にはしばしば流れ落ちないまま、ものに引っかかっている
年頃の娘たちの遺棄死体があったといわれる。
局部に石や棒切れをさしこまれているのは、
いうまでもなく主人の玩具になった末に 奥方に殺された不幸な運命の主人公であった。
李氏朝鮮時代の身分制度
この時代(1392年―1910年(ただし、1897年からは「大韓帝国」であったが、
実体は李氏朝鮮時代))の身分制度も高麗時代のものを継承した。
身分は、大きく「良民」と「賤民」に分かれる。
「良民」とは、自由民であり、納税、国役の義務を負い、
さらに「両班(文班、武班)」、「中人(下級役人、技術官など)」、
「常民(農民、商人、職人)」に分けられた。
「賤民」は「奴隷―奴婢」と「白丁(ペクチョン)(動物の屠殺に従事する者)」、
「才人(広大ともいう)(芸人)」、「官妓(役所に所属する酌婦)」、
「牽令(キュンエン)(牛・馬を引く者)」、「砲手(猟師)」、「水尺(スチョク)
(狩猟民)」、「駅卒(駅の使用人)」、「巫女」、「僧侶」など多岐にわたっていた。
「奴婢」は「公奴婢―国家に所属するもの」と
「私奴婢―個人に所属するもの」に分けられていた。
さらに奴婢は「公奴婢、」「私奴婢」とも「入役奴婢」と「納貢奴婢」とがあった。
「入役奴婢」は、国の労役や主人の雑役に従事しなければならないが、
「納貢奴婢」は国や主人から独立の生計を営みながら一定の身貢をする義務があった。
「奴婢」は売買、贈与、相続の対象となった。
つまり、財物として扱われていた。
父母の一方が奴婢の場合は、子も奴婢となった。
「両班」が罪を犯し「奴婢」になったり、
「奴婢」が軍功などで「中人」、「常民」になったりすることもあったが、
極めてまれで身分間の移動はなかった。
豊臣秀吉の朝鮮征伐
(文禄の役(1592年―朝鮮では壬辰倭乱(イムジンウェラン)・
慶長の役(1596年―朝鮮では 丁酉再乱(チョンユウチェラン))のときに、
ソウルの王宮(景福宮)が放火され炎上したが、
これは日本軍のものではなく(朝鮮では日本軍が放火したと捏造している)、
奴婢が登録簿を滅失させるために行ったものである。
日本の名誉のために当時の文書から引用する。
「城中を観望すれば、火起こりて煙焔天に漲る。 蓋し乱民先ず、堂隷院刑曹を焚く。
その公私奴婢の文籍在る所を以ってなり・・・・」
(朝鮮史第四編第九巻宣王25年4月30日)。
奴婢制度は、1894年の甲午改革で廃止されるまで続いた。
しかし、なかなかその偏見は収まらず、
現在でも「五姓」といって賎民の子孫とされる「姓」があり、
結婚・就職などの障害が見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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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リ・ニコル・アントン・ダブリィ主教「韓国事情」
「半島の両班は、まるで支配者か、暴君のごとくふるまっている。
両班は、金がなくなると、 使者を送って商人や農民を捕えさせる。
その者が手際よく金を出せば釈放されるが、 出さない場合は、
両班の家に連行され投獄され、 食物も与えられず、
両班が要求する額を支払うまでムチ打たれる。
両班の中で最も正直な者たちも、 多かれ少なかれ、
自発的な借用の形で自分の窃盗行為を偽装するが、それに欺かれる者は誰もいない。
なぜなら、両班たちが借用したものを返済したためしが、いまだかつて、ないからである。
彼らが農民から田畑や家を買うときは、ほとんどの場合支払いなしで済ませてしまう。
しかも、 この強盗行為を阻止する守令は一人もいない。」
スウェーデン人 アーソン・グレブスト
李氏韓国の残酷な死刑や拷問に対して
「こんな状況がまだこの地球の片隅に残されていることは、
人間存在そのものへの挑戦である。
とりわけ、私たちキリスト教徒がいっそう恥じるべきは、
異教徒の日本人が半島を手中にすれば真っ先に
このような拷問を廃止するだろうということだ」
アメリカの鏡・日本 ヘレン・ミアーズ
「悲劇の韓国」 「韓国は古くから中国の属国だった。
国を統治する王家はあったが、彼らは中国朝廷に朝貢し、
外交政策は中国に指導を仰いでいた。」
フランス人宣教師 シャルル・ダレ(韓国事情・平凡社東洋文庫)
1871 年から、1872年にかけて、驚くべき飢餓が半島を襲い、国土は荒廃した。
あまりの酷さに、西海岸の人々のなかには 、
娘を中国人の密航業者に1人当たり米1升で売るものもいた。
北方の国境の森林を越えて遼東半島にたどり着いた何人かの韓国人は、
惨たらしい国状を絵に描いて宣教師達に示し、
「どこの道にも死体が転がっている」と訴えた。
しかし、そんなときでさえ、 半島国王は、中国や日本からの食料買入れを許すよりも、
むしろ国民の半数が死んでいくのを放置しておく道を選んだ。」
http://sound.jp/sodaigomi/dorei/kankoku/tamesihara.htm
■ 한국 문화
신혼 첫날밤 훔쳐
신혼 첫날밤 엿 (신혼서나 엿)는
신혼 첫날밤 침실을 들여다보고 한국의 전통 풍습이다.
한국에서는 신반욧뽀기 (신방 엿보기)한다.
신반 (신보)은 신혼 부부의 첫날밤 침실 것으로, 욧뽀기은 들여다 의미이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신혼 첫날밤에는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침실 미닫이에 구멍을 뚫어 속을 들여다 봐하는 습관이 있었다.
엿의 습관이 태어난 이유는 조혼이 성행했기 때문에
어린 부부가 실패하지 않도록 지켜 때문이다 든가,
신혼 부부를 악귀로부터 보호 등이라고한다.
최근에는 주택 사정의 변화 등으로 들여다되지 않게되어오고있다.
한국의 신랑 왕따
신랑 처리 (신랑 취급 신랑 다루기)은
신랑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대한민국의 전통 풍습이다.
결혼식 후에 신랑이 신부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신부의 친척과 이웃 사람들이
집단 신랑을 둘러싸고 정신적 인 괴롭힘을 실시한다.
지방에 따라, 왕따 것이 다르지만 다음과 같은 왕따가 열린다.
신랑의 발목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하고 막대기로 발바닥을 때리는 것을 계속한다.
심한 경우에는 맞은 신랑은 걷는 것이 어려워 질 수도있다.
또한 신랑에 한시를 만들라고 강요하고 서툴지에게 트집을 바보 취급한다.
신혼 부부의 성적 것을 호기심 따거나 이것 저것 질문 추궁한다.
연회 돈을 가져 오라고 말한다. 등의 위협이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신부의 집에서 요리와 술을 가져 오면 왕따를 그만 연회가된다.
현대에서는 피로연 회장에서 왕따가 수행 될 수있다.
씨받이
씨받이 (조선어 : 씨받이)는
한반도에서 이씨 조선 중기 이후 존재했던 풍습의 하나로,
집의 후계자가되는 남자를 얻기 위해 아이를 낳기위한 여성을 고용한다.
또한, 거기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대리모와 비슷한 개념이다.
한일 합방 후 금지되었다.
씨 (주)이 "종"을 받이 (파지)가 "받는 것 (물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본어로 '종 받고 "으로 번역 될 수있다. 또한, 식물의 채종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있다.
운동 아랫배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임신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성행위를하고 능욕하는 행위.
옛 조선에서는 아버지의 권리가 절대적이라고합니다.
여자는 아내도 딸도 노예 취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집 보내는 딸이 확실하게 임신 할 수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모 형제 강간하고 임신 한 상태에서 시집 보내는. 선천적 인 아이들은 노예 신분.
성인까지 생존 확률도 적다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다고 고통의 일생을 보내 게된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조선에서는
"도구 (여) 결함 (불임증 등)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것은이 거리, 임신 할 몸입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종 남자 '라는 남자에게 딸을 짓게 임신 한 상태에서 출가시키는"
이것을 "운동 아랫배"고 말합니다.
태어날 아이는 당연히 남편의 혈통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내와 같은 노예적인 신분 밖에없고, 결혼은 커녕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사람도 드물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친척 가까운 남자 (오빠와 삼촌) 임신시켜
임신 할 수있는 여성 입증시켜 시집 유교 사상이 폭주 한 나쁜 습관이라고합니다.
노예 제도
노비는 물건을 매매 · 약탈 · 상속 · 증여 · 담보의 대상이되었다.
그들은 단지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주인이 때려도 범해도 팔아 치워도 끝은 목 격추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갓난 아이의 손을 비트는 것처럼 아주 간단하게 주인은 비 여자들을
성 도구로 한 것이었다. 영부인들의 질투를 샀다 기념비 여자는 打ち据え되고,
심한 경우 살해되기도했다.
외관 만은 인간이지만 주인의 사실상 가축과 다르지 않았다 기념비 여자들은
매각 · 린치는 물론, 살해 되어도 살인되지 않았다고,
한말, 물 도랑이나 강에 종종 흘러 않은 채 물건에 붙어
년경의 딸들의 유기 시체가 있었다고한다.
현지에 돌이나 나무 토막을 연결되어있는 것은,
물론 주인의 장난감이 된 끝에 영부인에게 살해당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이씨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
이 시대 (1392 년 -1910 년 (단, 1897 년부터는 '대한 제국'이었지만,
실체는 이씨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도 고려 시대의 것을 계승했다.
신분은 크게 '양민'과 '천민'으로 나뉜다.
"양민"는 자유민이며, 납세, 국가 역의 의무,
또한 "양반 (문 반, 무반)", "바쁜 사람 (하급 관리 기술 요원 등)"
"상민 (농민, 상인, 장인)"에 분할되었다.
"천민"는 "노예 - 노비 '와'백정 (뻬쿠쵼) (동물의 도살에 종사하는 자)"
"재인 (광대라고도 함) (연예인) ','관기 (관청에 소속 된 酌婦)"
"牽令 (큔엔) (소 · 말을 끄는 사람)", "포수 (사냥꾼) ','물 척 (스쵸쿠)
(수렵민) ','역 과정 (역 하인) ','무녀 ','스님 '등 다양했다.
"노비"는 "공공 노비 - 국가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노비 - 개인에 속하는 것"으로 나누어 져 있었다.
또한 노비는 "공공 노비," "나는 노비"도 "입 역 노비 '과'납 공헌 노비 '와이 있었다.
"입 역 노비 '는 국가의 노역이나 주인의 잡역에 종사해야하지만,
"납 공헌 노비 '는 국가와 주인으로부터 독립 생계를 영위하면서 일정한 몸 공헌 할 의무가 있었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되었다.
즉, 재물로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부모의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되었다.
"양반"이 범죄 '노비'가되거나
"노비"이 군공 등으로 "바쁜 사람", "상놈"이 할 수도 있었지만,
매우 드문 신분 간의 이동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
(임진왜란 (1592 년 -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임진왜란) ·
임진왜란 (1596 년 - 조선에서는 정유재란 (정 유우 최 란))의 때
서울의 왕궁 (경복궁)가 방화 된 화염했지만,
이것은 일본군의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방화했다고 날조하고있다)
노비가 전화 번호부를 멸실시키기 위해 실시한 것이다.
일본의 명예를 위해 당시의 문서에서 인용한다.
"성중을 관망하면 화재 발생으로 연기 불꽃 하늘에 넘치는. 蓋し 란 백성 먼저 당 隷院 형조를 피우는.
그 공사 노비 문장 국적있는 곳을 습득해도됩니다 ..... "
(조선사 넷째 편 제 9 권 宣 왕 25 년 4 월 30 일).
노비 제도는 1894 년 갑오 개혁으로 폐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그 편견은 맞지 않고
현재에도 "고세이"그렇다고 천민의 자손이라고하는 "성"이 있습니다.
결혼 · 취직 등의 오류가 보인다.
배 배 배 배 배 배 배 배 배 배
마리 니콜 안톤 다부리ィ 감독 "한국 사정"
"반도 양반은 마치 지배자하거나 폭군처럼 굴어있다.
양반은 돈이 부족하면 사자를 보내 상인과 농민을 잡아 보게한다.
그 사람이 예술적으로 돈을 내면 석방되지만 내지 않는 경우
양반의 집에 끌려 투옥, 음식도 주어지지 않고,
양반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 할 때까지 채찍 찍는다.
양반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자발적인 차입의 형태로 자신의 절도 행위를 가장하지만, 거기에 속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양반들이 차용 한 것을 보상 한 운동이, 아직도 과거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농민에서 논밭이나 집을 살 때는 대부분의 경우 지불없이 끝내 버린다.
게다가이 강도 행위를 저지하는 보수 령은 한 명도 없다. "
스웨덴 인 아손 · 구레부스토
이씨 한국의 잔인한 사형과 고문에
"이런 상황이 아직도이 지구 한구석에 남아있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 부끄러워 할 것은,
이교도의 일본인이 반도를 손에하면 가장 먼저
이러한 고문을 폐지 할 것이라는 것 "
미국의 거울 · 일본 헬렌 미아즈
"비극의 한국" "한국은 옛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
나라를 통치하는 왕은 있었지만, 그들은 중국 조정에 조공하고
외교 정책은 중국에 자문을 구했습니다. "
프랑스 인 선교사 샤를르 · 다레 (한국 사정 · 헤 본사 동양 문고)
1871 년부터 1872 년에 걸쳐 놀라운 기아 반도를 습격 국토는 황폐했다.
너무나 가혹함에 서해안의 사람들 중에는
딸을 중국인 밀항업자에 1 인당 쌀 1 되에 판매 것도 있었다.
북방의 국경 숲을 넘어 요동 반도에 도착한 몇몇 한국인은
끔찍한 나라 말을 그림으로 그려 선교사에게 보여주고,
"어느 길에 시체가 널려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반도 국왕은 중국과 일본에서의 식량 매입을 용서보다
오히려 국민의 절반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 해두면 길을 선택했다. "
一般人
12:名無しさん@13周年:2013/08/26(月) 11:10:17.22 ID:8CZPAo000
■韓国の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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