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徒数が、激減しもうすぐ廃校しかないのかという「危機」からの脱出。

そこには、ウリハッキョを必ず守る、存続させるという強い信念と覚悟が・・・

朝鮮新報に掲載された西東京朝鮮第二学校 校長の手記を紹介します。

<니시도꾜제2 교장의 수기>

우리 학교, 우리 후대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아끼겠습니까



  오늘 김정일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총련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나가는데서 민족교육사업 특히는 학생인입사업을 강화발전시키는것은 초미의 과제로 나서고있습니다.

  이미 《조선신보》에 소개된바와 같이 우리 학교는 최근 3년사이에 2006년당시 21명이였던 초급학교 학생수를 그 2배인 42명으로 확대하였습니다. 9년전에 페원한 유치반도 2007년에 다시 개원하여 원아 9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늘 학생, 원아수를 51명으로 확대할수 있었습니다. 일시 유치반을 페원하고 학생수를 격감시켜 페교위기까지 겪었던 우리가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켜 장군님의 심려를 다소나마 덜어드릴수 있었던것을 우리 교직원들은 기쁨으로 간주하고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 교직원들이 한 일은 오늘의 높은 요구에 비추어보면 초보적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4일 총련중앙 허종만책임부의장이 우리 학교사업을 지도하면서 우리 사업을 치하해준것이 계기가 되여 저는 우리의 경험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요청의 전화들을 여러곳에서 받고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해온 일이 무슨 특별한것도 아니고 어디에서나 다 하고있는 일이 아닙니까.

  생각끝에 각지 일군들의 학생인입사업에 자그마한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다고 생각되여 여기에 몇가지 경험을 적으려고 합니다.

■《선대에 대한 의리, 후대에 대한 책임을》

  수년전만 해도 우리 학교의 실정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운영이 어렵고 학생수가 해마다 감소되여 9년전에 유치원을 휴원하고 5년전에 중급부를 휴교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학부모들속에서는 《이제 더 학교는 지탱할수 없게 되였다.》, 《니시도꾜제2는 이제 문을 닫게 될것이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였습니다.

  학교교육을 직접 담당한 우리들은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첫시기 우리가 주인답게 생각하고 모든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보았던가 하면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학교사업을 잘하는것이 맡은 임무이지 학생인입은 총련지부가 해주어야 할것이 아닌가 하면서 불만을 품는 교원도 있었습니다. 또한 학교운영이 어려워지자 학교분위기가 무거워지기만 하였습니다.

  2005년 어느날 중급부의 휴교를 결심하는 토론모임때의 일입니다.

  그동안 중급부존속의 마지막기회를 모색하다가 이날을 맞은 우리 교원들은 흐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중급부가 휴교되였다고 해도 우리가 여기서 주저앉게 되면 이 지역의 민족교육의 불이 꺼진다, 선대들이 피땀으로 마련한 이 학교문을 닫는 죄를 우리가 지을것이냐, 60년이상의 력사가 있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우리 학교가 문을 닫으면 도대체 이 지역의 우리 학생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지는가.

  참으로 피를 토하는것 같은 눈물의 토론들이 계속되였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 학교를 지켜야 한다, 선대에 대한 의리와 후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자, 우리가 니시도꾜제2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홰불을 높이 들자는 결심에 모두가 도달하였습니다.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자!》

  우리는 사상적일치를 보고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자!》는 기백으로 사업에 달라붙었습니다.

  우리는 우선 동포들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는 여러가지 방책을 세웠습니다.

  통학길이 멀어서 보내기 힘들다는 의견을 듣고 5년전부터 통학뻐스를 내왔습니다.

  부모가 일하고있어 학동보육을 시켜야 하므로 일본학교에 보낼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4년전부터 교직원의 힘으로 저학년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동보육《도토리》를 내왔습니다. 숙제지도를 하고 새참도 주며 알뜰히 돌본 다음에는 통학뻐스로 안전하게 바래줍니다. 그러니 통학뻐스는 아침 한번, 저녁에 두번 달려야 했습니다.

  우리 학동보육은 숙제지도를 못하는 일본어머니, 일본국적동포들을 비롯하여 일을 가진 부모들로 하여금 우리 학교에 대한 신뢰를 두터이 하는 좋은 계기로 되였습니다.

  학부모들속에서 《일본학교에는 급식이 있는데…》 하는 말이나 모든 학생들이 친 형제처럼 한자리에서 점심식사를 시켰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자 우리는 일군력량을 확대하지 않고 우리 교직원들의 힘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전교생의 급식을 친어머니심정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어머니들의 고생을 덜자고 우리 교직원들이 시작한 급식은 점차 학생들로 하여금 김치, 비빔밥, 떡국 등과 함께 민속명절때는 송편, 화채, 화전, 팥죽도 맛보게 함으로써 학교가 민족의 맛을 선보이고 익숙시키는 공간으로 되였습니다.

  참으로 전교생이 한자리에 앉아 뜨뜻한 밥과 국을 먹으니 학생들모두가 한가정처럼 화목해졌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계획이 있어 한 일이라기보다 《닥치는대로》 좌우간 일을 시작하자, 시작해서 결과를 보자는것, 바꾸어말하면 필사였다는것입니다.

  우리는 학생들을 잘 키우는 일이 바로 학생인입사업에로 이어진다는 신심을 가지고 수업의 질제고, 학생교양, 소조활동 등을 위해 있는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수업의 질제고를 위해 교수진단을 꼭꼭 진행하였으며 교원들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습니다.

  또한 운동회, 학예회, 수업참관 등을 잘 준비하여 학교를 찾아온 학부모, 동포, 인입대상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학생들은 예술경연대회, 체육대회, 미술전람회, 구연대회 그리고 꼬마롱구대회때마다 우수한 성적을 올렸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비단옷》이라는 말그대로 아무리 성과가 있어도 그것을 제때에 알리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학생들의 자그마한 성과도, 아름다운 소행도 즉각 속보에 실어 동포학부모들에게 나누어주고 《조선신보》, 《이어》를 통해서 널리 알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학부모들속에서 학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학생들의 성과와 교원들의 노력을 함께 기뻐해주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즐기고 학교를 사랑하고 자랑하니 학교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도 자연히 날마다 높아졌습니다.

  학교를 지지하는 학부모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학생인입사업에서 예상외의 큰 힘을 발휘한다는것을 우리는 후날 여러번 체험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학교 인입대상은 반드시 있다

  소자화와 날로 촉진되는 《귀화》현상으로 인입대상을 찾는것이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성관념을 버리고 대상의 폭을 넓히기 위해 힘썼습니다.

  총련지부들의 대상명단이 매우 적어 그 폭을 넓힐 문제가 절실하였습니다.

  학교창립 60돐을 계기로 작성한 졸업생명부가 귀한 자료로 되였습니다. 졸업생들의 정보망을 리용하여 아이의 유무, 나이를 료해하고는 전화부터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졸업생들은 반가와하면서도 아이를 우리 학교에 보내는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난처해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찾아가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을 키운다고 하는것은 학창시절만을 책임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 학생들에게는 그 어떤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민족의 넋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새로이 한 나날이였습니다.

  각종 대외사업도 귀중한 인입사업의 공간으로 여겨 준비위원회단계부터 참가하였으며 민단동포와 일본사람과의 문화교류모임에도 적극 찾아가 정보를 모았습니다.

  대외사업에서 우리 학생이 출연한 모습에 감동한 어떤 일본국적동포가 인사를 한러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 교원이 정성으로 대하고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될 때까지 사귀여 끝내 편입, 신입 두장의 입학원서를 받은데 이어 그 동포의 연줄로 역시 일본국적을 가진 동포자녀 4명을 편입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나 2대에 걸쳐서 상실한 민족성을 3대째 아들딸에 의해 되찾게 되였다.》고 하면서 어머니자신도 지금 우리 말교실에서 열심히 배우고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입생을 받아들이려면 부모도 부모이지만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정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가장 가까이 지내게 되는 재학생들도 인입사업에 동원하였습니다.

  소년단지도원이 학생들에게 과업을 제기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여 년 3번의 학령전어린이와 재학생들의 놀이모임 《함께 놀자요》를 기획하고 조직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칠석모임, 크리스마스모임, 떡치기를 조직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춤도 보여주며 학생들이 생각해낸 놀이(껨)로 하루를 지내는것입니다.

  학생들이 인입대상어린이, 편입대상학생을 맡아 업어주고 안아주며 놀아주는 모습은 따라온 부모들에게 큰 감명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상어린이가 《그 언니가 있는 조선학교에 꼭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망설이던 대상동포가 입학원서를 가져온 일도 있었습니다.

(学校を守りぬくこと④http://blogs.yahoo.co.jp/nyomeng60nisitk/33885452.htmlへ続く)